[빈센트 반 고흐] 그림 속 직조공은 ‘자본주’인가 ‘노동자’인가?

창녀 출신 동거녀 시엔과 헤어지고 도피하듯 들어가 지내던 드랜트에서의 고행(?)을 마치고 뉘넨으로 돌아온 고흐가 쏟아낸 작품은 ‘직조공’(Weaver) 시리즈이다. 뉘넨에서 1년 정도 머물며 그린 30여 점(습작 포함) 모두가 직조공 테마였다.

직조 기술자를 예술 작품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고 여긴 화가는 당시 고흐뿐이었던 것 같다. 상당량의 작품을 이 한 주제에 할애하기까지는 다른 화가들이 이 주제를 기피한다고 여긴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누가 전도사 출신 아니랄까봐 그런 편견을 부당한 것으로 간주했다.

무엇이 부당하다는 것일까? 이 침침한 공간에서 일하는 가엾은 노동자를 외면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일까?

좌편향의 비평가들은 직조공에 얽힌 역사를 단순 노동자 측면에서만 읽어 주려는 편견에 매몰되어 있다.

가령,

1844년. 이 해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1840년대는 산업혁명이 전 유럽을 휩쓴 시기였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경제발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단순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가난을 대가로 치른 발전이었다. 농노제의 최후의 잔재가 폐지되고 영업의 자유가 도입되었건만, 새시대는 농민과 노동자에게 무엇보다도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굶주리고 뼈빠지게 일할 ‘자유’만을 주었다. 독일의 직조공들도 그 같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공장주였던 츠반치거에게 감자를 살 수 없을 정도로 임금이 적다는 하소연을 하자 츠반치거가 “풀이 잘 자랐는데 그거라도 먹으면 되겠네”라고 응수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당시 돈 많은 자본가들은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더욱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여기 이 가정도 그런 극심한 가난 속에 방치돼 있다. 누더기 같은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아이는 죽음에 임박한 것 같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어머니는 지친 듯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모든 걸 체념한 모습으로 망연히 서 있다. 아이는 이미 죽음의 신 해골의 품에 안겨 있다.

─오마이뉴스, “케테 콜비츠 ‘직조공 봉기’” 중에서.
Misery (1893-4) by Käthe Kollwitz

콜비츠 판화 한장 소개하는데 저렇게 감성적인 글빨로 자본시장의 태동을 악마화한다. 저 매체의 장기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시각을 지닌 비평가의 흔한 오해이기도 하다.

이들 그림에 등장하는 직조공은 ‘단순노동자’가 아니다. 자본주이다. 영세하지만.

직조공의 유래는 산업화의 희생양이 아니라,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맞물려 자본 시장의 선구자 정신에 유래한다. 열강의 직조공 길드는 인도의 상인들과 직거래 할 정도로 독립 자본이었다. 이들의 쇠락은 단지 산업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인도회사 같은 다국적 기업과의 경쟁에서 자본 잠식당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탐욕의 주체였던 때도 있다.

고흐의 나라인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튤립파동(Tulip mania)은 자본의 탐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투기 사태로서 튤립 뿌리 하나에 황소 465마리 값어치와 맞먹는 인플레를 경험하게 했다. 이 투자를 주도한 것이 바로 직조공들이었다. 고흐가 태어나기 200여 년 전 일이다. 그 거품이 꺼지면서 네더란드는 영국에 경제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Flora’s crazy wagon (1637/8) by Hendrik Gerritsz Pot

헨드리크 포트의 ‘플로라의 미친 마차’는 당시 직조공의 탐욕을 풍자한 대표작이다. 꽃의 여신 플로라가 꽃다발로 유혹하며 상석인 뒤에 앉아 있고, 뒤통수에도 얼굴이 달린 여자가 가장 앞에, 그리고 환전상 또는 술꾼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탄 마차가 광풍에 달려나가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무리들이 바로 직조공들이다.

이것이 바로 고흐 시대 다른 화가들이 (소작농은 소재로 삼을지언정) 직조공은 소재로 삼기를 기피한 정서일 것이다.

고흐는 나름대로 이런 기피를 바로잡겠다고 여긴 것같지만, 그런 그의 열정을 동생 테오조차 납득하지 못했다. 후원자인 동생 테오에게도 그런 소재는 단지 ‘장사치’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흐는 동생의 그런 미온적인 태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림을 아예 팔아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편견을 비난했다.

고흐의 ‘직조공’ 연작 1 (1984)

오늘날의 비평가들이 고흐의 직조공 연작을 마치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Artworks)의 <미저리>처럼 산업화의 희생양으로 소개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단순 노동자가 아니라 영세한 자영업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 직조 기계를 ‘괴물’ 또는 ‘아기를 맞은편에 둔 채 직조공이 (기계에) 삼켜지는 듯한 모습’으로 비평하기도 한다.

고흐의 ‘직조공’ 연작 2 (1984)

당시의 직조공이 고된 노무에 갇혀지낸 것은 맞지만, 이 작품은 괴물 기계에게 삼키는 도상이라기보다는 비록 쇠락해가고 있지만 가내 수공업의 잔잔한 평화에 더 부합하는 이미지이다.

고흐의 작품은 칙칙하고 우울한 것은 맞지만, 사물에 대한 악마화에는 부응하지 않는다. 절제가 들어 있다. 좌편향 된 비평에는 부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인 직조공이 앉아 있는 저 기계는 ‘괴물’이 아니라 자식이 앉아 있는 유모차에 상응한 구도적 유비일 뿐이다.

고흐는 자신이 시도한 이런 장르에 대한 시장의 비관적인 반응에도 직조공 그리기를 고집했다. 이 주제 속 주인공은 언제나 직조공이다. 직조 기계나 베틀이 아니다. 직조공이 그 그림의 심장부가 되도록 구성했다.

고흐의 ‘직조공’ 연작 3 (1984)

그렇다 보니 이처럼 채색을 입힌 직조공의 경우에는 고흐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조화롭지 못한 현상이 발견되기도 한다.

고흐 자신은 분명 배경 안의 검정색 옅은 어두움이 그림 전체의 중심부가 되도록 꾀하고 있음에도, 결국 그의 의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도리어 베틀이 되고 마는 도상 현상이다. 이것이 아기가 앉은 유모차에 유비해 아버지가 온종일 앉아 일하는 사물로서 비칠 뿐 악마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흐는 특히 직조공에게 전형적인 소작농 복장인 청색을 입히는 바람에 전반적인 분위기를 종교적인 칙칙함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것은 ‘장사치’라는 이미지를 벗겨주고 싶은 고흐의 의도였을 것이다.

어쨌든 좌편향 비평가들이 고흐의 우울감을 케테 콜비츠의 ‘미저리’처럼 끌고 가는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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