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성화 역대작품 25선

연대: 1400년대. 작가: 무명. 

설명: 성무일도서(Breviary/ Book of Prayers)의 삽화. 이 성무일도서는 가톨릭이 국교였던 스페인 시칠리아 아라곤의 왕 마틴이 소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마틴이 다스리던 때는 아라곤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굳건한 능력과 헌신에 따른 내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의미있는 책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이 인상적인 묵상집도 그 중의 하나였다. 1398년 포블레트의 시토파 수도원(Cistercian monastery of Poblet)에서 제작 된 것으로서, 일자/절기에 따라 삽화가 삽입된 이 작품은 아마도 프랑스 왕실에서 배포한 묵상집을 본떠서 만든 작품이었을 것이다(베리 공작의 기도서/ de Berry’s ‘Petites Heures’).


연대: 1440. 작가: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

무덤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와 그를 찾고 있는 여성들을 그린 프레스코이다. 15 세기 후반 플로렌스의 산 마르코(San Marco)에는 도미니칸 수도사가 있었다고 한다. 수도원 기숙사와 암자들의 벽면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아름다운 장면들로 채워져 있는데 수도사의 침묵하는 삶에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생각에 몰입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되 무덤의 여성들을 그린 이 그림도 화가가 그 수녀원에 머물던 약 1436-1446년 경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 도상에 나타난 인물들이 아주 단조롭게 배치되어 있지만 이에 대해 정교함이 부족하다고 비평하는 것은 그른 판단이다. 부활이라는 주제에 관한 것만 강조하고 그 외의 불필요한 세부 묘사는 안젤리코가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어떤 은혜와 위엄도 그녀들의 슬픔을 감추지는 못한다. 본성 상 물리적 실체는 아니더라도 그 확고한 권위로 안도감을 주고 있는 천사가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설명을 들려주고 있다. 머리를 숙이고 눈을 낮추고 기도하는 모습은 도미니칸의 전형적인 기도의 모습이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


연대: 1443. 작가: 파울로 우첼로 (Paolo Uccello)

설명: 플로렌스 두오모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 파울로 우첼로는 1397년 피렌체에서 태어 났으며, 그의 삶 대부분을 그곳에서 그림 그리는 일로 보냈고, 1475년에 같은 곳에서 죽었다.
그는 원근법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한 화가이며, 많은 계승자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서는 ‘사랑’도 기하학적인 형태 속에서 파악된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대개 입체파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두오모의 유리창에 빛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열린 관 위에 떠 있는 듯, 죽음을 초월한 모습이다. 여기 저기에 짙은 녹색의 감동이 있다. 녹색은 새로운 삶의 신성한 전례의 색이기 때문이다.
창문 양쪽에 있는 잠자는 병사들은 이탈리아 전쟁에서 통상 광범위하게 고용 되는 외국인 용병의 모습이다. 경호와 수위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에도 적합하지 않은 병사들이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 용병들은 점점 더 상업성에 매몰되었으며, 그것은 곧 가능한 한 무혈로 싸우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임을 알았다는 뜻이다. 화려한 전열로 배치 된 군대간에 전투를 벌이는 경우 때때로 사상자가 거의 없이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때도 있었다. 그들은 팔다리보다 더 긴 창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 우첼로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에, 잠 들어있는 이들 두 병사를 위치시킴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연대: 1463. 작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설명: 부활 벽화. 피나코테카 코무날레의 산세폴크로(Pinacoteca Comunale, Sansepolcro)
이 그림에서의 병사들은 위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창에 우첼로(Uccello)가 표현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매우 인간적이며 자신들이 수행해야 하는 지루한 임무에 대해 비교적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 그림은 해부학에 단련된 프란체스카의 묘사력을 엿보여준다. 갈색 옷을 입고 몸통만 묘사된 사람의 경우 독특한 채색이 되어 있으며 아무 생각없이 잠이 든 그의 얼굴은 마치 그의 어머니만 사랑할 수 있는 유아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어 흥미롭다. 이 회화는 또한 프란체스카가 혁신적으로 선보이는 단축법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왼쪽 다리와 발이 자신을 무덤에서 들어 올릴 때의 사실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가가 말하는 이 그리스도는 우리 위에 떠 있는 미묘한 존재가 아니라 진정한 사람인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는 결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얼굴은 정면으로, 오른손으로는 십자가 깃대를 세우고, 마치 추종자를 전투로 이끌 듯 어깨를 곧게 세우고 있다.


연대: 1465. 작가: 도나텔로 (Donatello)

설명: 브론즈 설교단.
(중세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죽은 후에 림보로 내려갔던 것으로 여겨졌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은 그의 죽음 후에 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들의 최전선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께 나아간다.
교회 기물 가운데 이 특별한 성물은 도나텔로의 삶의 끝자락에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가 한 마지막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인지 아니면 그의 견습생의 작품인지 약간의 논란이 있으나, 부활의 중심부 만큼은 그의 작업으로서 논란의 여지가 없다.
도나텔로는 사건의 심리적인 흐름을 탐구하기를 좋아했던 화가다. 중앙 패널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잠자는 병사들 위로 우뚝 솟아 서 있다. 그의 권능이 그들로 하여금 의식하지 못하도록 꿈꾸게 함으로써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만 같다. 또한 버려진 고문 도구와 그것들 중에 하나인 양각된 전갈 방패가 옆으로 기대어 놓여 있다. 전갈은 죽음의 상징이다.


연대: 1475. 작가: 지오반니 벨리니 (Giovanni Bellini)

설명: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 예배의 중심은 제단이었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거룩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였다(가톨릭 교리/ 성체). 빵을 봉헌한 직후 그는 회중의 모든 구성원이 볼 수 있도록 그것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때에 이 지오반니의 제단화가 제단 바로 뒤에 서 있는 제단을 배경으로 펼쳐졌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제가 성체를 하늘로 향하게 하면, 그 의식에 맞춰 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 무덤에서 천국으로 올라가 보이는 것이다. 이런 연출이 미사 때 마다 반복되었다.
예수님의 신체가 모셔졌던 관의 모양은 제단의 디자인과 비슷하여 그림과 실제 성례의 미묘한 평행이 강조되도록 설계 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제단 위에는 흰색 천이 깔렸는데 그것은 버려진 수의와 다르지 않으며, 새벽 하늘, 나무에서 새로 나는 잔가지가 자연의 새로움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새 생명의 상징인 당돌한 토끼가 예수님의 발 앞 쪽에서 움직이고 있다.


연대: 1477 – 1489. 작가: 바이트 슈토스 (Veit Stoss)

설명: 이 부조는 크라쿠프 성모 교회(the Church of Our Lady, Cracow)의 특별 제단 중의 한 부분이다. 42×36 인치 너비의 삼부작으로 제단 뒤에 배치 되어 있다.
부조 속의 예수께서는 무덤에서 약간 물러 선 것처럼 보인다. 그분의 어색한 포즈와 개봉되지 않은 관 뚜껑은 신체 상태의 어떤 변화를 암시한다. 석궁을 들고 있는 병사들은 모두 15세기의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제단 전체는 대단히 웅장한데, 약 12년 간을 이 교회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모든 제단화가 그렇듯 두 개의 측면 패널은 닫을 수 있게 제작 되었으며, 미사를 위해서만 열렸을 것이다.


연대: 1490. 작가: 브라만티노 (Bramantino)

설명: 브라만티노(1465-1535)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드(Lombard)의 화가이자 건축가였다. 그의 진짜 이름은 바르톨로메오 수아르디(Bartolomeo Suardi)였으며 그의 작품들은 훌륭한 건축물 배경으로는 유명했으나 이 작품의 저작권에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이 예수상이 건축적인(다소 차거운) 면모가 그의 저작권을 지지한다 할 수 있다. 얼굴과 몸과 외투가 차겁고, 예수님 주위를 감싸는 망토는 피부의 창백함을 비추는 듯한 것이 금속성의 광채를 내고 있다. 건축가다운 필치인 것이다. 피부는 폭력의 상흔과 함께 정맥까지 다 보여 주고 있지만 빛이 나고 창백하며 특히 눈은 슬프다 못해 이 세상 분이 아닌 듯 하다. 신체와 얼굴 색이 다른 것이 얼굴에만 좀 생명력이 남아 있는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남성 이미지를 포착하려고 했던 분명한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 차거움의 분위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선 죽음을 겪은 후 완전히 세상과 분리되어 더 이상 우리가 살고있는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면모로서 이 작품의 분위기는 탁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연대: 1490. 작가: 한스 멤링 (Hans Memling)

설명: 비평가들은 대개 한스 멤링에게 경멸을 쏟아 붓곤 하는 편이다. 멤링의 작품은 대부분 다른 화가들을 모방할 뿐 독창적인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 그런 평가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멤링의 그림에 나타나는 사람 얼굴은 대개 감각적인 미묘함의 극치를 지니고 있다. 그 미묘함은 한 마디로 우리 모두가 제 각각 다르면서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의 영적 세계로서의 통일성일 것이다.
여기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된 이 제단화가 바로 그런 표정의 동선이 아주 잘 표현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중앙은 부활한 그리스도, 좌측에는 순교자 세바스찬(the martyrdom of St Sebastian) 그리고 우측엔 승천하는 그리스도와 그것을 지켜보는 목격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부활 장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병사들이 잠을 자고 있다. 그러는 동안 무덤에서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걸어 나오고 있다. 한편 좌측 패널은 순교자 세바스찬이 옷이 벗겨진 채 화살을 맞고 있는 장면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으로 인해 황제 디오클레시안에게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는데, 특별히 그의 처형을 그의 수하에 있던 병사들이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제국에 대한 그의 불충에 대해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본보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측 패널에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로 보이는 여성과 제자들이 그들로부터 영원히 떠나가시는 부활 예수의 승천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우리가 저 우측 패널 장면을 보노라면 과연 제자들이 실제로는 예수님 옷 아래로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하는 불경한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림 속의 예수님의 발 부분은 어정쩡한 표현임에 틀림없지만, 좌측부터 이 세 번째 패널에 당도할 때쯤 우리는 약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바스찬의 얼굴과 중앙에서 잠들어 있는 병사의 얼굴과 승천하시는 예수 바로 아래서 놀라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닮았다는 사실이다. 동일 인물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변화무쌍한 모습이기도 하다.


연대: 1510. 작가: 암브로지오 보르고뇨네 (Ambrogio de Stefano Borgognone)

설명: 평온함. 순응함. 고요함. 섬세한 자연주의. 그리고 확고한 슬픔. 이런 것들은 보르고뇨네가 이 작품에서 제시한 그리스도의 속성들이다. 보르고뇨네가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신이면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자신의 험난한 삶에 대한 염려로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넘어서고서 그의 영광으로 나아간다.


연대: 1510. 작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Matthias Grünewald)

설명: 예수의 두상 부분이 황금색으로 되어 있는 이 독특한 그림은 알자스의 이젠하임(Isenheim)에 있는 세인트 안토니 수도원(St Anthony’s Monastery) 예배당의 제단화 중 한 부분이다. 해당 제단화 일체는 위에서 보이는 것 처럼 접이식 제단화 두 세트 앞뒤로 붙어 있어서 예전/의식 중 클라이맥스에 가서 접이식 제단화가 펼쳐짐으로써 부활 장면으로 전환 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두 제단화 중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도상이 가장 먼저 연출 될 패널이다. 그 패널에는 사도 요한의 보살핌을 받는 ​​모친 마리아의 비통함과 그 바로 곁 땅바닥에 쓰러진 막달라 마리아의 비통함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시선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이 예언한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 아래에서 어린 양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상징한다. 이때 제단의 날개가 열리고 나면 완전히 다른 광경이 회중의 시선을 맞이한다. 이제는 황금 색 불빛으로 황홀하게 바뀐 것이다. 앞서 먼저 보였던 이면의 패널과는 달리 이 안쪽 패널에는 빛이 넘쳐난다.
이 빛의 드라마는 부활 장면의 배경인 어두운 밤 하늘에 특히 선명하게 다가 온다. 그뤼네발트가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빛을 가져오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뤼네발트의 그림에서는 병사들이 잠들어 있지 않다. 마치 육체적 고통을 일으키기라도 한 듯 그 광채에 나가떨어져 있다. 눈이 부시어 당황하고 있으나, 입고 있는 갑옷으로도 전혀 보호 받을 수 없다. 그들 위를 신비로운 그리스도께서 공중부양 해 계시다. 회중을 향해 펼쳐져 보이는 그의 손바닥 상처만이 바로 직전에 견뎌 내었을 법한 고통을 상기시킨다.


연대: 불확실한 1560년 경. 작가: 피터 브뤼겔 (Pieter Bruegel the Elder)

설명: 이 드로잉은 그 어떤 그림보다 이 지구 상의 땅을 잘 포착해 낸 그림일 것이다. 무덤의 입구가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 마치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하다. 중력의 작용을 받지 않는 듯한 천사는 커다란 무덤 뚜껑 위로 올라가 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신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거대한 돌뚜껑 위에 걸터 앉은 듯해 보이는 그 천사 위로 떠오르고 계시다. 지금 막 온 것으로 보이는 여성들은 천사를 바라보고 있고, 병사들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수습하고자 한다. 이 그림은 인간의 활동들로 가득 차 있다. 전경에 펼쳐진 광경에 대해서 모두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이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연대: 1577. 작가: 엘 그레코 (El Greco)

설명: 엘 그레코는 카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에게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화가였다. 다층의 구조를 자랑하는 그의 작품들에서 볼 때 그는 비잔틴 신비주의와 결합하여 자신의 고향 크레타 섬의 베네치아 매너리즘 전통의 음울한 색채를 풍부하게 가져다 쓰는 화가다. 엘 그레코는 스페인 예술의 전형을 표현해 낸다. 관능적이면서도 정교한, 독특한 감성이 세기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그가 그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폭풍우가 끼치는 위협적인 하늘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여러 작품에서의 하늘은 종종 이와 같이 폭풍우로 채워져 있다. 이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황금색 프레임은 그림 자체보다 지나치게 강조되기 때문에 프레임으로서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 그리스도의 부활 이미지를 이와 같이 둘러싸기 위하여, 다름 아닌 이교도 그리스 성전과도 같은 이런 프레임 구조를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연대: 1611-1616. 작가: 루벤스 (Rubens)

설명: 루벤스는 다른 어떤 플랑드르(Flemish) 거장들보다도 17세기 바로크 양식 형성에 기여를 했다. 그의 작품은 살아있고 극적이고 관능적이며 인간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것들은 화려하고 관대하고 관능적이며 그 광대함이 최고의 바로크 예술과 음악의 모든 특질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한 포즈가 전체 공간을 지배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다른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의 몸으로 그 모든 아름다움 속에 있다. 그로써 승리한 한 사람이다.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활기/활력은 루벤스 특유의 능숙한 빛과 그림자 묘사로써 증폭되고 있다. 어두운 부분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비명을 지르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빛으로 빛난다. 빛과 어둠의 이 예리한 대조는 루벤스가 이탈리아에서 카라바치오(Caravaggio)의 작품을 접하면서 고무되었을 것이다.


연대: 1635. 작가: 렘브란트 (Rembrandt van Rijn)

설명: 위에서 보았던 루벤스의 ‘부활’과 이 그림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렘브란트가 그린 이 그림에서의 그리스도는 무덤의 어두움에서 방출되는 순수한 빛이라는 점에서, 물리적인 것보다는 어떤 신학적 진술에 종사한다. 이 빛에 비추어 볼 때, 그림 속의 인간들은 혼란에 빠진 공중의 새들과도 같다. 렘브란트는 17세기의 가장 유명한 네덜란드 화가이자 전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카라바치오가 성공적으로 사용한 그 동일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강렬한 빛이 주변의 어둠을 극복하는 것 말이다. 1630년대는 렘브란트에게 특히 번영의 시기였다. 그는 부유한 미술상의 조카딸인 사스키아(Saskia van Uylenburgh)와 결혼했고 네 명의 자식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 ‘부활’을 그린 해에 그 첫째 아들이 태어났지만 곧 죽은 해이기도 하다. 이 그림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복, 즉 부활은 지극히 종교적인 것이지만 헌신적인 한 가정의 남자이기도 했던 화가 자신에게는 자신이 체험하는 그 고통스런 시간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한층 의미심장 하게 보인다.


연대: 1805. 작가: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설명: 이 그림을 통해 우리 모두는 생명이 그의 몸으로 돌아올 때 그와 함께 무덤 안에 있다. 두 천사가 그를 지켜 세 번째 발걸음을 내딛으면 무덤 문을 열 수 있다. 돌이 굴러져서 관객은 천사를 지나서 쌀쌀한 바깥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빛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적인 시각이므로 매우 보기 드문 구도를 띤다. 예술가들은 대개 언제나 무덤을 들여다 보거나 그리스도가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무덤 바깥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장면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명은 ‘무덤의 돌을 굴리는 천사들’(Angels Rolling away the Stone from the Sepulchre)이다.


연대: 1867. 자가: 니콜라이 게이 (Nikolay Gay)

설명: ‘부활의 조짐’(Harbingers of the Resurrection)이라는 이 그림은 크게 볼 필요가 있다. 전체 전경에서 더 깊이감을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게이는 훌륭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사상가였다. 사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그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와는 잘 맞지 않았다. 첫 작품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재치있는 훌륭한 장면을 그렸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심판’은 그 당시 행해졌던 수많은 다른 종교 그림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게이가 점차 나이 들었을 때는, 많은 사람에게 야만적이고, 산란했으며, 불쾌한 작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의 ‘그리스도와 빌라도’(1890)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금지 당하기까지 했으며, 그의 ‘십자가 형’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보다 더 무시 무시하고 현실적이었다. 이 ‘부활의 조짐들’은 이 그림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늘과 천사는 둘 다 생명의 권역에 있지만,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병사들과 어둠의 요새를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도취됨를 나타낸다.왜냐하면 부활이 곧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연대: 1886. 작가: 티쏘 (James J. Tissot)

설명: 영광스럽고도 지극히 여린 천사가 무덤 앞 대기실(?)에 서 있다. 이 천사는 고전적인 옷차림을 입었고 두 쌍으로 된 매우 현실적인 날개를 가지고 있다. 천사의 뒤에는 이제 돌처럼 보여야 할 커다란 편평한 모양이 있으며 입구에서 멀리 굴러간다. 무덤 안쪽에 두 다른 천사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그림의 가장 왼쪽에 네 개의 날개가 보인다). 티소는 부활의 그림을 그렸지만 적어도 그 말은 최선의 표현은 아니다. 적어도 이 그림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을 것 같다.


연대: 1920. 작가: Theodor Baier

설명: 이 그림의 예수님은 어떤 왕자님 또는 어떤 훌륭한 신사가 자기 목욕탕에서 막 나오신 것 같아 보인다. 예루살렘에 있는 로마 당국이 이 사람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지키고 염려했던 이유가 바로 이래서인가? 싶을 정도… 게다가 핑크색 수의라니…


연대: 1957. 작가: Michel Ciry

설명: 이 부활한 그리스도는 중세 회화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와 있는지, 렘브란트나 델라 프란체스카(della Francesca)의 그리스도 상들과는 얼마나 극적으로 대조를 이루는지 잘 보여준다. 그 차이는 오늘날 현대적인 그리스도의 완벽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20세기에는 기독교 신앙이 신화화를 이미 벗어나 있다. 예수님 인성은 그의 신성을 희생하면서 강조되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종종 그리스도의 신성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어려워 한다. ‘역사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현대인의 마음을 휘어 잡았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는 희생당하고 만 것이다. 21세기 사람들은 신화적 또는 상징적 사고를 다루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합리적인 사고에 대한 현대의 믿음은 모든 것이 ‘증명할 사실’이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혀 신빙성이 주어지지 않는 진리다. 따라서 20세기에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델리에 있는 댄이라는 한 인물과 매우 흡사하게 보이는 이유이다.


연대: 1998. 작가: 아르카바스/장 마리 피로 (Arcabas/ Jean-Marie Pirot)

설명: 프랑스에 있는 세인트 폴 드 메이떼 교회(St Paul de Meythet Church)에 있는 이 세련되고 극적이며 개연성이 강조된 작품은 큰 그림의 크기를 통해 그 앞 제단을 강조하고 있다. 매우 가치가 있는 현대 종교 예술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의 모습은 제단의 전체 공간을 지배하는 데 기능한다. 작가 아카바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기독교는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종교인 것이다.


연대: 1998. 작가: 프레드릭 하트 (Frederick Hart)

설명: 프레드릭 하트는 예수의 몸에 대해 무중력을 적용해 포착하였다. 그것은 자신의 인성을 초월해 우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신체는 도나텔로(Donatello)의 다윗 상을 연상케 한다. 팔을 뻗은 몸의 위치는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한 팔의 굴곡은 대단히 현대적인 감성을 자아낸다.


연대: 1875. 작가: 칼 블로흐 (Carl Heinrich Bloch)

설명: 칼 블로흐는 19세기 덴마크의 예술가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일련의 작품을 그렸는데, 덴마크의 프레데릭스보그 궁전(the Frederiksborg Palace)에 보관되어 있다. 그의 그림은 오늘날 예술 애호가들을 기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인물들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평온한 유럽인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예수님의 삶의 거친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현실에 대한 21세기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연대: 2001. 작가: He Qi

설명: 부활절 아침 (Easter Morning). 현대 작가 He Qi는 종교적 테마의 가장 인기있는 현대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이 그림에서 승리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암흑의 악마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그에게서 도망가는 신호로 올리고 있다. 여자들은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 이전의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그리스도에 의해 들어 올려진 군사적 이미지의 배너 대신에, He Qi의 그리스도는 빛나는 백합을 들고 있다.


연대: 2001. 작가: 사이먼 듀이 (Simon Dewey)

설명: ‘He Lives’라는 이 그림은 요즘 가장 많이 애용되는 부활절 그림일 것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이 현실적인 회화는 사실 전문가들 입장에서는 수준이 낮은 그림이다. 작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아다시피 매우 인기가 있으며 실제로 사이몬 듀이는 20세기 후반 가장 눈에 띄는 종교 예술가 중 한 명이다.


※ 상기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가톨릭 정서의 작품들이다. 프로테스탄트 이념의 작품들은 향후 따로 정리할 것이다.

* 이미지 출처: 바이블 탑텐.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