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가 런던에서 잠시 그림 판매원 혹은 책방 점원으로 전전하다 개신교 전도사로 일하게 된 것은 1878년 경이다.
4년 전 런던 출신의 한 여성에게 당한 실연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한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기서 얻은 우울감은 전도사로 변신하는데 기여한 것보다는 그의 생애 전체를 우울질로 뒤덮도록 만드는데 더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브뤼셀에서 전도사가 되기 위한 소정의 단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러나 수료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관한 당시의 전통적 접근 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까닭이다. 수료 없이 벨기에 남서부 탄광 지역 주민을 위한 선교를 떠났으나 이른바 ‘말씀 대로’ 가난한 자에게 모든 것을 나눠주는 바람에 선교는 일찍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1881년에 그는 부모님과 함께 브뤼셀에서 에텐으로 이사했다. 그 때가 고흐의 삶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의 종교적 열정이 예술로 전환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강력한 종교적 확신이 존속되는 동안 그는 복음 전도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형화된 방식이 아니라 그림을 통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느질하는 여인>은 그런 감성을 항해하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 첫 작품이다.
어떤 전능하신 신을 숭배하는 장면 또는 그 신의 영이 스며들어(soaking) 있다는 식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바느질하는(sewing) 행위 자체로서의 일상, 그 자체가 고흐에게는 영적인 것이었다.
수채 물감을 통해 대기를 표현하는 기법의 이 그림에─ 그는 이 표현법을 1888년작 <꽃의 정원>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등장하는 여인이 실제 인물인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당시 에텐에서 모델을 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당시 소작농들에게 있어 나들이 옷이 아닌 평상복 차림으로 어떤 포즈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어떤 책의 한 장면을 베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다.’ 싶은 사람들이 속출할 성싶지만, 왜 고흐(Gogh) 것만 역작에 꼽히는가?
당신 작품엔 피와 살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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