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신분에서 거상(巨商)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관직에까지 올랐던 실존인물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은 최인호의 소설 속에서 살아생전 세 가지 위기에 봉착했다.
첫 번째 위기는 인삼 무역을 위해 중국 베이징에 갔을 당시 현지 상인들로부터 인삼 불매운동을 당할 때이다.
이때 임상옥은 영적 멘토 석승이 적어준 비책 하나를 꺼내본다. 석승과 헤어질 때 석승이 말하길 인생에 있어 큰 위기가 세 번 찾아올 것인데, 그때마다 한 개씩 꺼내 보라며 세 가지 비책을 준 터이다. 둘은 글자요 하나는 잔(盞)이었다.
꺼내든 첫 번째 비책에는 ‘죽을 사(死)’자가 적혀 있었다. 중국 현지 상인들의 보이콧에 직면한 임상옥은 이 ‘죽을 사’자를 깊이 음미한 뒤, 행동이 단호해졌다.
상단을 도로 귀국시켜야 하는 날에 임박하자 중국 현지 상인들이 보는 앞에서 극상품의 인삼들을 모두 불사르기 시작한 것이다. 인삼 상자들을 하나씩 불속에 집어던질 때 마다 상인들의 탄식이 쏟아졌다. 그러다 급기야 상인들은 임상옥을 말리며 인삼 전량을 구매한다. 불에 탄 인삼 값까지 지불하며.
사(死)자를 ‘죽으면 산다’(死卽生)로 해석했던 것이다.
두 번째 위기는 임상옥이 어엿한 상단으로 자리 잡았을 때 찾아왔다. 당시 상단에는 똑똑한 사람 하나가 일을 하고 있었는데, 부자들의 곳간이 털리는 일이 빈번하여 민심이 흉흉할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임상옥 앞에서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그 난(亂)의 주인공 홍경래였다. 위장 취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상옥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홍경래는 자기가 주도하는 반정 혁명에 들어오라고 권했다.
말은 점잖게 하는 권고였으나 사실상 임상옥의 재산을 혁명에 바치라는 소리였다. 재물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절하면 결과는 뻔했다. 강제로 약탈을 할 심산이었다. 그렇다고 홍경래와 함께 일을 도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혁명이 자칫 실패하는 날엔 재산은 물론 삼족이 멸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임상옥은 통역관이 되려던 아버지가 일이 잘못 꼬여 일가족이 패족이 된 경험이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석승이 적어준 두 번째 글자를 꺼내본다.
‘솥 정’(鼎)자가 적혀있었다.
이것은 ‘죽을 사(死)’자보다도 더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풀 수 없었던 임상옥은 베이징에 갔을 때 알게 된 글 잘 쓰는 한 젊은이의 도움으로 그 의미를 깨닫는다.
그 의미는 중국의 춘추오패의 장왕이 타국을 정복하였으나 완전히 망하게 하지 않고 은덕을 베풀어, 보다 큰 왕이 되었다는 고사와 함께 해석되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모름지기 솥의 크기나 무게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솥을 떠받치고 있는 세 개의 발에 있으므로 그것이 잘못 되면 솥은 쓰러져 뒤집히고만다는 교훈이었다. 전통적으로 솥의 삼발이는 인간의 세 욕심 즉, 명예·권력·재물을 상징하는 바, 상인인 자신이 재물 외에 나머지까지 취할 순 없는 노릇이라는, 아주 완곡한 거절이었다. 이 말을 듣고 홍경래는 순순히 물러났다.
‘솥 정’(鼎)의 의미를 알려준 젊은 이는 다름 아닌 추사 김정희였다.
세 번째 위기는 말년에 찾아왔다. 그것은 내면적 위기였다.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의 그런 위기였다. 전자의 두 위기와는 달리 잔잔하게 찾아든 이 세 번째 위기에서 그는 마지막 비책을 꺼내들었다.
‘계영배(戒盈盃)’라는 이름의 잔이다.
그 뜻을 헤아리고 있던 차, 임상옥은 마당에서 우연히 놀라운 장면 하나를 목격한다. 솔개 한 마리가 모이를 쪼아 먹고 있던 닭 한 마리를 채가는 모습이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종말을 들여다 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에게 빚을 졌던 모든 상인을 불러 탕감해주고 사실상의 사회환원을 감행한다.
계영배(戒盈盃)란 일정량이 차오르면 다 새어나가게 고안된 잔, 즉 ‘가득차는 것을 경계하는 잔’이었던 것이다.
이 세 가지의 위기가 실제 역사적 실존 임상옥에게 찾아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늘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것이다.
특히, 임상옥과 홍경래와의 만남은 분명 비 역사적인 것이지만, 큰 거상(巨商)들이 시절마다 깃드는 혁명가들이 가해오는 수난에 노출된다는 사실은 언제나 역사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