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에 관한 여섯 번째 글.
고흐가 전도사 생활을 하다 화가로 전업하는 이야기를 담은 1회분을 시작으로 고흐 자신의 완숙한 화풍을 이루어나가는 변화와 추이를 5회분까지 추적해왔는데, 이번 글에서는 전업 화가로 돌아서기 이전, 그러니까 1회분 직전 시기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한 편을 읽으며 시작하려고 한다.
테오에게…
오랫동안 여러 이유로 침묵을 지켜왔지만, 어쩔 수 없이 펜을 들게 되었다. 그동안 너는 나에게 이방인이 되어버렸고…이렇게 지내지 않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좋을 텐데…네가 50프랑을 보냈다는 소식이 에텐에서 왔더구나. 그래서 그 돈을 받기로 했다. 물론 많이 망설였다. 의기소침해지기도 했지만, 내 상황이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으니 달리 어쩌겠니…
싫든 좋든 나는 가족에게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존재이고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겠니. 그래서 멀리 떠나 있는 게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중략>
지난 5년의 세월 동안 나는 안정된 직장 없이 늘 궁지에 몰린 채 방황해 왔다. 너는 내가 그동안 뒷걸음질만 치면서 나약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나도 이따금 밥벌이란 걸 하긴 했다…생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야 할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도 맞는 말이고, 공부가 무척 허술하고 빈약하고, 필요한 것을 다 구하기에는 내가 가진 재능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점점 퇴보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바로 나올 수 있는 것이냐?
<중략>
왜 대학을 끝까지 마치지 않았느냐고, 왜 그들이 나에게 바라는 것을 계속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그 문제라면 학비가 너무 비싸다는 대답밖에는 할 말이 없다…<중략>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야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을 멈춘다면, 나는 패배하고 만다. 묵묵히 한 길을 가면 무언가 얻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내 최종 목표가 뭐냐고 너는 묻고 싶겠지.
초벌 그림이 스케치가 되고, 그 스케치가 유화가 되듯, 처음의 모호한 생각을 다듬어감에 따라, 그리고 덧없이 지나간 처음의 그 생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감에 따라, 그 목표는 더 명확해질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히 성취되는 것이 아닐까?그것은 예술가뿐 아니라 복음 전도자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아야 한다.
─“1880년 7월 태오에게 보내는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05), 16-26. 참조
이따금 밉살스럽고 전제적이며 격식만 따지는 전통이 오래된 학교를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고통을 혐오하는,
한마디로 편견과 관습의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생략>
편지를 읽는데 내가 동생이었다면 돌아버렸을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고흐였다면 “내가 징징거려서 부담스럽냐?”라는 생각으로 편지를 썼을 것 같다.
이 편지 이후 두 형제는 예술가와 스폰서 관계가 된 것으로 보이지만, 고흐는 이 편지를 전후로 무엇을 해도 안 되는 신세였다. 전도자로서의 길도 여의치 않고, 화가로 변신하자니 출신도 없고, 실력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잠재력 밖에 없었다.
이 편지를 작성한 시기로부터 5년 뒤 고흐는 ‘소작농’ 이미지에 흠뻑 빠져 지내다 ‘직조공’ 이미지에 대한 집착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들 이미지에 대한 집착은 모종의 대상에 대한 강박관념 양상을 띠었다.
이 시기의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하루 온종일 계속해서 소작농의 삶만 들여다 보니, 다른 것은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어. 아예 그 안으로 빠져들어 있다구…”
소작농의 삶에 관한 실제 일상은 이 시기에 그가 분출시킨 모든 예술성의 중심 주제였다. 길고도 힘들었던 고흐 자신의 몸부림의 일부분이라도 되는 듯한 이 장면들은 앞으로 그가 전개해나갈 화폭에 가해지는 기술적 기초를 위한 연단이 되어주고 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비교적 후기에 속한 그림임을 감안하면, 정식 훈련을 받은 그림이나 화풍에 비해 여전히 뒤지는 그림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이제 이룩하게 될 향후의 위대한 작품들은 그가 어렵고도 어렵게 몰입했던 이 시기의 주제와 거기서 빚어낸 이 작업들에 크나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오두막 밖에서 땅을 파는 소작농 여인’(1885)이라 불리는 이 작품 상의 초가집 두 채는 마치 새의 둥지를 연상시키고 있다. 당시 고흐는 새 둥지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은 집들은 ‘인간 둥지’로 불렸다.
이런 주제 선택, 그리고 선택한 그 주제를 표현한 미술적인 가공은 당시 그가 가장 존경했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75)에게 받은 영향에 따른 것이다.
사회적 현실주의를 그렸던 밀레의 그림은 고흐의 후기 작품인 ‘낮잠’(The Siesta, 1889)에서는 아예 직접적으로 모사(模寫) 되기도 한다.
1885년 고흐는 다른 장르를 시도한다.
초상화 연작에 착수한 것이다. 그 연작 중 하나가 ‘검은 두건을 쓴 소작농 여인’(Head of a Peasant Woman with Dark Cap, 1885)이다. 이 초상화를 그리고 나서 고흐는 무척 고무되었는데,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안톤 반 라파르트(Anton van Rappard)의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다. 절친인 라파르트는 마치 고흐가 앤트워프 여행을 곧 준비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의 좋은 그림이라며 막 띄워주었다.
이 친구의 조언은 고흐의 표현에 의하면, “더 많은 체험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동생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내게 지금 막 기회가 다가오고 있어. 그래서 나는 두상을 50개 정도는 번갈아가면서 그려야 해. 가능한 한 빨리…”
확실히 고흐는 초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기술적인 전환점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얼마 안 있어 이런 내용의 편지가 동생에게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최근에 난 거의 두상 아닌 것들을 주로 그린단다.”
아무튼 고흐의 이런 자신감은 고흐를 이내 초상화 화가로서의 자질로 간주될 정도까지 부풀려졌다.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가 꾀한 시도는 인물에 대한 얄팍한 표현보다는 차라리 그 모델의 개성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가 과연 이 목적을 얼마나 성취한 것인지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자신의 엄격한 기준에 의거한다면 이 <검은 두건을 쓴 소작농 여인의 머리>는 고흐 자신에게는 실패작이었다.
실제로 고흐는 자신이 볼 때 이들 연작 중에 전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단 한 장도 없다고 여겼다. 심지어 이 초상화 속 여성은 그가 마음속에서 이상적인 모델로 그리던 모델상과 사실은 완벽하게 어울리는 개성을 가진 인물상이었음에도, 그는 이렇게 쓰며 아쉬워하고 있다.
만약 내가 원했던 ‘거칠고’, ‘마른 얼굴’, ‘낮은 이마’ 그리고 ‘얇은 입술’, ‘예리하지는 않지만 가득찬’, 그리고 밀레(의 그림)처럼.., 그런 적합한 모델들만 쓸 수 있었더라면…”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징징 대는 형이나 가족이 집에 하나 있었다면 다들 돌아버렸을 듯 하다.
그리고 그런 고흐 자신 역시 “내가 징징거려서 부담스럽냐?” 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계속 징징거렸을 것 같다.
그가 징징거리며 실패작이라고 생각한 그림이 바로 이 그림이다.
밀레가 세우는 모델과 같은 수준의 모델을 쓰고 싶어 했지만, 그가 상상하던 모델의 모습은 바로 이 그림 속 모델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고흐는 밀레 ‘따라쟁이’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실은 밀레보다 위대한 자신의 붓힘이 이 그림 속에서 이글거리며 잉태되고 있었다.
- 빈센트 반 고흐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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