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라고 하는 용어는 둘 이상의 명확한 주체를 단수로 합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그들이 단지 서로 통하고 사귀는 때에는 ‘통섭’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다. 그리고 그 양자를 완전히 녹여 구별 없는 단수의 체계로 만드는 작업을 우리는 ‘융합’이라 부른다.
요즘 부쩍 전향자들의 언변을 통해 이 용어들을 자주 듣는다. 특히 음지를 향한 막연한 부채 의식으로 투사된 자기 카타르시스를 전향으로 오인한 분들로부터 그런 용어들을 듣는다.
주된 테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화두가 단지 민주주의라는 그 한 가지였던가라는 의구심을 내내 씻어낼 수 없다. 마치 자기들처럼 전향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반역이라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닌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고심한다. 그렇지 않나.
왜냐하면 동성이 결혼하는 나라들에서도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고, 백성은 굶어 죽는데 1000억 원에 달하는 쇠 덩어리를 핵 실험 명목으로 하늘에 내다 버리는 집단도 민주주의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통합’이라는 주제 자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전향자들이 전언하는 그대로 대다수 정당들은 ‘동원’을 ‘통합’인줄 착각하고 있고, 또 그 전향자 자신은 헤겔이 가르친 막연한 어떤 ‘종합’을 ‘통합’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가 아쉽다.
사제 신분으로 내거는 현실 정치 논평이 어찌 생각될는 지 모르겠으나 현실과 저 떨어진 하늘의 별나라 얘기나 걸어 올리고 찌개 끓여 먹는 사진이나 올리는 게 사제의 도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우리 기독교 사제들이 읽는 성서에서는 억지스런 ‘통합’이나 간교한 ‘통섭’이나 이교적인 ‘융합’이라는 용어 보다는 ‘화합’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화합’이라는 말은 화해(reconciliation)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사제들에게는 본분상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할 의무가 기본적으로 주어지지만 나는 특별히 양족에 포진한 전향자들을 위해 기도와 응원을 보내는 바이며, 어느 쪽이든 부디 ‘화합’을 이루어내길 축복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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