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법률을 적힌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배럿

현대 사회의 성원들 간에는 법 의식에 있어 두 가지 통념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법을 절대적 언명으로 받아들이는 정서이고, 다른 하나는 법을 사회적 합의로 받아들이는 정서이다. 단순히 시민의 법 정서가 그렇게 갈려 있다기보다는 법의 해석자인 판사들이 이미 그렇게 해석의 갈래로 나뉜 상태인 것 같다. 이를테면 ‘우리법OOO’라는 법조인의 회합은 어떤 해석을 공유하는 모임일까. ‘너희법’과는 다른 법이라는 소리일까?

어쨌든 멀리 있는 미국의 대법관 한 명 선임하는데 이토록 떠들석한 이유는 법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해석자인 판사에 따른 상이한 판결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한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에이미 코니 배럿

미국의 대법관은 아홉 명이다.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에서 인준한다. 현재의 대법관은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3명, 빌 클린턴이 임명한 1명, 오바마가 임명한 2명,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2명(에서 에이미 배럿까지 이제 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당 성향으로 보면 6대 3인 셈이지만 대법관 성분을 단순히 정당으로 채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앞서 언급한 대로 모종의 법 해석 노선으로 양분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대척점에 서 있는 법 해석을 크게 ‘문언주의’와 ‘역동해석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언주의는 텍스추얼리즘(textualism)이라는 용어가 말하듯이 법률를 판단할 때는 어디까지나 법률의 사전적 의미를 최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의 해석 이론이다. 이 문언주의를 토대로 한 원전주의(originalism)가 있다. 헌법의 문언과 그 제정자의 의도에서 명확한 결론을 도출한다는 법해석 이론들이다.

이에 반하여 역동적해석이론은 무엇일까?

이 개념은 빌 클린턴이 임명했고 지금도 살아 있는 스티븐 브라이어(현재 가장 나이가 많음) 대법관이 낸 책 <역동적 자유>의 행간을 살피면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최고법원의 판사는 헌법의 문언적 한계를 넘어 헌법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목적에 해석적 초점을 맞춰야 한다… 중략…미국 연방헌법은 ‘역동적 자유’(Active Liberty)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헌법 문언 해석을 통한 문제해결이 불가능할 때 최고법원의 판사는 ‘역동적 자유’ 실현을 위해 최선의 해결책을 고안해 제시해야 한다”

<역동적 자유>(사회평론아카데미)

우리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므로 이처럼 이론만 들어서는 어떤 차이인지 이해가 더디지만 판결의 예시로 보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다.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했던 스칼리아 대법관의 경우가 대표적인 문언주의자로서 ‘낙태할 권리’, ‘동성혼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법관 중 하나이다. 그녀는 낙태할 권리, 동성혼 권리.., 이런 사안은 헌법 문언상에 전혀 근거가 없으며 법 제정자가 그런 권리를 인정했다고 볼 역사적 근거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 사회에서 뜨거운 주제인 개인 총기 소유 자유화에 관한 법리에 있어서도 스칼리아 대법관은 총기 소유 자유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2조를 고수하는 대법관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스칼리아가 대법원을 보수적 판결 합의체로 다 주도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동성결혼 합법화가 대법원에 의해 확정될 때 스칼리아가 재임 중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판사들의 종교도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 참고로 당시 동성혼 합법화 판결이 진행 중일 때 판사들의 종교는 다음과 같았다.

Antonin Scalia, — Roman Catholic
Anthony M. Kennedy, — Roman Catholic
Clarence Thomas, — Roman Catholic
Ruth Bader Ginsburg, — Jewish
Stephen G. Breyer, — Jewish
John G. Roberts, — Roman Catholic
Samuel A. Alito, — Roman Catholic
Sonia Sotomayor — Roman Catholic
Elena Kagan — Jewish

과거 미국의 최초 대법관들은 9명 전원이 프로테스탄트로 출발하였다고 하는데 상기와 같이 프로테스탄트는 단 한 명도 없던 시점에서의 판결이다. 이들의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1) 결혼제도는 과거와 달리 많이 붕괴되었다,
2) 동성부부가 어떤 면에선 오히려 그 제도에 더 순응한다,
3) 게다가 그들은 그동안 박해까지 받아왔다. (그것이 미합중국의 ‘체험’이 되었다)
4) 따라서 결혼제도를 불허할 어떠한 이유도 없어지고 말았다.

법에 관한 문외한이 듣기에도 ‘역동적’인 판결문이다.

대표적 문언주의자였던 스칼리아 대법관은 79세 되던 해인 2016년에 어느날 갑자기 죽는다. 그 바람에 오바마는 한 사람의 대법관을 자기 손으로 더 세울 수 있었다. 앞에서 ‘역동적자유이론’을 설파한 스티븐 브라이어의 책자는 스칼리아 사망 직후 혼란 정국에서 자기네 연방법원의 노선이라며 발표한 일종의 공보 책자였던 셈이다.

이번에 트럼프가 임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은 바로 이 죽은 스칼리아 대법관의 서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 이념으로도 스칼리아 대법관을 따른다고 공개 천명한 바 있다. <역동적 자유>의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은 80세가 훌쩍 넘은 상태이고 스칼리아의 맥을 잇는 배럿은 아직 50세가 안 되었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은 미국 대법원의 균형이 보수적인 경향으로 넘어오길 기대하고 있다.

입양아를 가족에 포함하고 있는 배럿의 가정

이런 이슈로 우리가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대법관은 80세가 넘었어도 은퇴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사실이다. 아니,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우리 족보의 법관을 임명해 줄 권력자가 나타나야만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다. 그때까지는 이를 악물고 살아 숨쉬고 있어야 한다. 80이 훌쩍 넘은 스티븐 브라이어처럼. 다른 족보의 법관을 임명할 권력자가 출현했을 시점에 죽었다간 힘의 균형이 저쪽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법치 철학은 어떤 노선일까?

역동 자유? 우리법? 니네법?

놀라운 사실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한항공 땅공 회항 사건에서 당시 피고였던 부사장이 임의로 ‘항로를 변경했다’는 사유로 재판을 받았을 때 피고에게 벌을 주려는 측에서는 지상도 항로라고 주장한 반면, 지상을 항로라고 해석하는 것은 문언에 위배된다는 사유로 무죄가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법 철학 정서가 만연한 이 시국에 문언주의 판결이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법이든 니네법이든 법관이라면 모름지기 배럿이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을 유념했으면 좋겠다.

“판사는 법률을 적힌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판사는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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