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감각을 추구하는 욕구와 언어적인 욕망은 같은 것이다. 미술 자체가 ‘쾌’(快)에 종사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미술적 추구가 언어 추구와 동기화될 때 일어나는 쾌는 현시욕과 관련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네이티브 외에 다른 언어를 배우려고 열정을 쏟아 붓는 사람은 대개 통역이 하고 싶기 때문이다. 미적 재능이 남다른 사람 역시 쾌에 대한 욕망은 대개 현시욕으로 표출되는데, 그것은 마치 앞서 외국(어)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 사로잡힌 사람이 약간의 외국어를 터득하여 타인 앞에서 통역할 때 도달하는 쾌와도 통하는 현시욕이다.
통역은 한 세계와 다른 세계의 중간에서 중개를 하는 선량한 행위 같지만, 이처럼 한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자신을 드러내고픈 현시욕에 기반을 둔 행위이다. 미적인 추구는 보편적 쾌이지만 ‘미술’은 통역처럼 이 세계의 상징을 저 세계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현시욕을 밀어 넣는다. 이 역동은 자의적일 때 파멸로 이끌지만, 여러 갈래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구를 여는 힘이 있다.
포괄적 언어술에 속하는 이것들은 중요한 종교적 자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의 경계선이기도 하다. 이런 간접화법에 비하면 직설화법을 구현하는 음악이란 장르도 있다. 음악은 직접적으로 자신이 숭배 받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종교 분야의 경우(특히 기독교), 미술·음악·언어에 각별한 재능을 보이는 종사자는 욕망에 차 있다고 보면 거의 무리 없다. 물론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런 사람은 ‘흉내’를 내서라도 그 욕망을 탈환하려들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상숭배와의 경계선상에서 모종의 재능을 출원하는 과정에서 출몰하는 욕망은 문자나 문법에 천착함으로써 완화하거나 바로 잡을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텍스트 독해’에 박약한 꾼들은 우상숭배자─특히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쾌의 현시욕으로부터 시각신(visible gods)을 제거하고 문자로 봉인해버리는 방법을 통해 우상숭배를 원천 차단하기도 했다. 그게 바로 시편이다.
각별한 재능을 보이는 사역자는 욕망에 차 있다고 보면 별 무리가 없다…특히 음악..자기 현시욕 우상숭배…찬양사역자들..우상숭배와 욕망의 경계선상에 있는 자들은 문자나 문법에 천착함으로 바로잡을수 있다. 일견 이해될거 같기도 하고
마음대로 해석하면 교회의 찬양과 예배에 대해 비판적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어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일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