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관련 어록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논리 실증주의 속에서 일상 언어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언어게임 이론은 우리 실생활에 적용하기에 용이하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명문 모음이다. 각 문장/패러그랩을 그대로 음미해보면 좋다. (몇몇 이해가 어려운 표현들은 다소 손질을 하였다)

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언어는 세계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반영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와 대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언어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언어와 세계는 모종의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이 공유된 구조가 언어와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이상의 질문은 곤란하다. 설령 언어와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구조라 하더라도 언어를 사용하여 그 구조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는 언어-세계 틀을 벗어난 것이 된다.

계산은 일반적으로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계산 역시 다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규칙을 따르는 인간의 활동이다.

우리의 언어가 계산처럼 고정된 형식적인 규칙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볼 수 없고, 숨바꼭질의 경우처럼 어느 정도 자의적이거나 임의적으로 규칙이 형성되는 측면이 있다.

‘아름다움’과 같은 하나의 단어를 이해할 때, 그 단어에 해당하는 심적 이미지나 심적 상태를 가지게 된다는 생각 역시 일반성에 대한 갈망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어린 아이가 모국어를 배울 때 처음에는 완전한 형태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볼 수 없다. 마치 집 짓는 사람의 언어처럼 단순한 요소들 만을 가지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 아이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표현들에 복잡성이 확대되어 어른이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cf. 원초적이고 단순한 언어들도 언어게임임에 틀림 없고, 하나의 완전한 의사 소통의 체계를 이루게 되는 한 요인으로 언어가 단지 정적인 상징체계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뗄 수 없는 역동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 우리는 음성이나 문자만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며 사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활동’이라는 것.

명제는 이름들의 연쇄로서 사실은 대상들의 결합이다. 따라서 하나의 명제가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은 명제를 이루는 이름들이 대상들을 적절하게 지칭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대상은 이름을 통해 지칭한다. ‘로미오’라는 이름을 통해 한 사람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로미오가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대상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로미오’ 이름의 담지자가 없어졌다고 해서 ‘로미오의 의미’도 동시에 없어진 것은 아니다. 로미오가 죽었다고 해도 여전히 로미오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며, ‘로미오라는 이름’을 통해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한 단어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 ‘단어의 사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때 단어의 사용이라는 것은 그 단어가 쓰이는 언어게임의 맥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어는 그것이 언어게임의 일부로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된다.

우리는 “엑스탈리버는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은 엑스칼리버가 산산조각이 났다 하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 언어게임에서 이름이 그 담지자가 없는 경우에도 역시 사용되기 때문이다.

명령을 내리고 그에 따르는 것.
대상이ㅡ 외관을 묘사하거나 측정하는 것.
묘사(그림)로부터 대상을 구성하는 것.
사건을 보고하는 것.
사건에 대해 숙고하는 것.
가설을 세우고 테스트하는 것.
표와 그림으로 실험 결과를 나타내는 것.
이야기를 꾸미고 그것을 읽는 것.
연극 연기하기.
돌림 노래 부르기.
수수께끼 추측하기.
농담을 하는 것.
산수의 문제 풀기.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묻기.
감사하기.
욕하기.
인사하기.
기도하기.
결국 이처럼 다양한 언어의 사용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삶의 여러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언어가 사용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맥락에 주목함으로써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누구든 직접 실행되고 있는 그 언어게임에 참여해야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규칙적이지만 언어게임을 불규칙적이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내적인 대상이란 곧 내적 감각을 말한다. 누군가 “나는 배가 고프다”고 했을 때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가 아프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내적 감각은 본질적으로 사적(Private)이다. 눈앞에 보이는 책은 공적(Public) 대상이지만 치통은 사적인 것이다. 나중에 감각을 자신에게서 확인했을 때 전달 가능하다.

아이가 다쳐서 울 때 그의 아픔은 울음이라는 통증행위를 통해 표현된다. 그런데 아이가 아파서 울 때 어른이 다가가서 “어디가 아프니? 다리에 멍이 들었구나?” 한다면, 어른은 아이에게 하나의 통증행위인 울음 대신 또 하나의 통증행위인 ‘아프다’는 언어적 표현을 가르친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인간의 감각에는 그에 동반하는 행위가 있어서 내적감각을 외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감각과 감각 행위는 동전의 양면이다. 타인의 감각은 간접적으로 전달 받을 수 있다. 결국 본질적으로 사적인 내적감각도 그에 동반하는 자연적 원초적 감각행위에 의해서 공적인 틀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공적인 틀은 궁극적으로 언어게임의 학슴을 통해 언어적 표현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거짓말로 ‘아프다’는 언어도 있다.
아프지도 않은데 ‘아프다’는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미 통증어의 언어게임을 터득한 후에나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의미와 관련하여 통증의 언어게임이 1차적인 것이고 거짓말 언어게임은 2차적인 것이다.

결국 통증을 느낄 때 찡그리는 행동을 매개로 하여 통증어를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할 때 언어게임이란 단순히 언어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언어적 요소와 결합된 것이다.

하나의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에 주목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단어가 사용되는 언어게임이라는 활동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제스처, 표정, 억양)

나에게 “손이 있다”가 1차적이고 “손이 없다”는 2차적인 것이다.

출처: Wittgenstein (서울: 이름, 2003).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