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작 <마더!>는 2014년작 <노아> 만큼이나 기독교인에게 불쾌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이 영화를 보고서 불쾌했을 기독교인이 계실 것 같아 몇 가지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드리고자 한다.
<노아>의 주제가 ‘아버지의 정의’였다면 <마더!>의 주제는 ‘어머니의 정의’이다. <노아>에서도 세상의 종말을 겪는 한 가정과 그 성원들이 신(神)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담았다면, <마더!>에서 역시 세상의 파국에 대한 신의 입장을 한 가정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두 영화에는 공히 종말과 파국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창조―종말―새창조’ 라는 아로노프스키 특유의 스키마를 보여준다.
<노아>에서는 우리가 평소 알고 있던 온순한 이미지의 노아는 온데간데없고 인류 멸종을 마땅히 여기는 의(義)로 충만한 노아만이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타락한 천사와 함께 살륙을 마다 않는 매정한 인물로 묘사되는 노아를 보고 있자니 심히 불편했지만 영화가 꾀하는 이야기의 완성도에서 거의 상쇄가 되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오해했던 것이 판명되어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가 알고 있던 노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마더!>는 지나치게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바람에 독립영화 스케일로 퇴행 해 있다. 그렇지만 <노아>를 압도하는 해체를 구사한다. 그 해체가 어느 정도인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가히 미국의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 해체된 기호들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손님접대(hospitality) 플롯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얼개이다.
- 손님은 천사들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다.
- 아담과 하와가 주인의 서재에서 함부로 물건을 만지다가 가장 소중한 물건 하나를 깨뜨린다.
- 그들은 쫓겨나고 서재는 봉인된다.
- 쫓겨난 둘은 성에 탐닉한다.
- 두 아들 카인과 아벨이 집에 들이닥쳐 서로 다투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다.
- 아벨의 피가 그 집에 스며들어 집에서 핏소리가 난다.
- 집은 그 자체가 세상이요 토양이다. 창세기의 첫 글자가 집을 뜻하는 ‘베트’(ב)로 시작되었기에 창세기로부터 흐르는 서사시의 주제 자체가 집이요, 그 집 주인은 시인이다.
- 그래서 이 집 주인의 직업이 시인이다. 아내는 오로지 집밖에 모른다. 진흙을 잘 다루는 그녀는 그 자신이 곧 흙/ 땅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인은 이상이 높고 크기 때문에 그 마음을 해량할 수 없어 언제나 무심하게만 느껴진다.
-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귀히 여길 따름이다. 무례한 손님, 폭력적인 손님, 음란한 손님까지 이 맘 좋은 시인이 모두 그대로 방치하는 통에 땅인 아내는 미칠 지경이다.
- 집에 온 손님들은 때로는 광신도로, 때로는 폭도로, 때로는 진압 공권력으로, 변신해가며 집을 유린한다. 이 광신도들과 폭도들은 시인인 남편의 시에 열광하되, 성인(St.)이 된 남편의 표식이라도 얻고자 열광한다.
-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집은 이미 전쟁터로 변해 있고, 광신도들이 저 위대한 시인의 표식인 아이를 채가서는 서로 돌아가며 안아보고 짓 까부르다가 그만 아이를 죽게 만든다. 그러고는 그 표식인 아이의 시신을 생식으로 먹는 것이 아닌가! 광신도들.
이러한 구성 속에서 이 영화의 의미를 밝히는 의미심장한 다이얼로그 하나가 나온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손님들에게 관대한 이 시인 남편은 손님들에게 알현시킨다는 명목으로 갓 태어난 아기를 아내에게서 앗아가고자 한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내에게 남편이 I’m His Father. 라고 하자 아내가 이렇게 받아친다.
I’m His Mother!
심오한 말이다.
고대의 문명들은 문명이 생겨나기 전부터 우상숭배를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하늘은 주신으로 대지를 여신으로 한 쌍을 이루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늘과 대지가 만나야만 땅의 소산이 맺힌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농경사회 즉, 땅의 조건과 하늘의 조건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농경사회에서의 당연한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래서 풍요란 본성적으로 우상숭배와 직결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하늘 우라노스와 대지 가이아가 있다면, 이집트 신화에서는 하늘 누트와 대지 게브가 있었다(여기서는 누트가 여성).
성서에도 이들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성적 모티프는 배경이 되어 나타나지만 유대교는 신의 여성성은 절대 수용하지 않았다. 기독교 중에서 개신교는 그러한 전통을 보전하고 있지만, 가톨릭의 경우만 이 여신 숭배 모티프를 이어 가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하늘 우라노스 격인 시인을 무심한 남편이자 무심한 창조주로 묘사하는 반면, 집에 대한 애착과 살림 밖에 모르는 현숙한 그의 아내는 인간이 딛고 서는 땅으로 묘사함으로써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땅을 유린하는 지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신심 좋은 기독교도를 포함하여.
다만, <마더!>가 유리 조각을 들고서 사람을 찌르는 장면이라든지, 시인인 남편이 자신을 일컬어 ‘스스로 있는 자’(“I am I,”)라고 말하는 대목은 신성모독이기에 앞서 영화에 내재된 훌륭한 메타포들을 일시에 망가뜨리는 설정들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의 무심함과 그에 대한 땅의 비통함은 매우 깊은 신학적 이해로 유인한다.
정통한 전승에 따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탄식은 ‘마더!’가 아닌 ‘아들’을 통해서 분명하게 하늘을 향해 땅이 울부짖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cf. 막 15:34; 마 27:46; 시 43:2)
한 줄 평: 땅이 신음하는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