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겟아웃>을 관람하면서 나에게는 대번에 이런 생각들이 솟구쳤다. “만약 링컨 대통령이 살아서 이 영화를 본다면 뭐라 말했을까?”, “링컨은 흑인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원하기는 했을까?”
1. 다양하게 진화된 흑과 백의 논리
영화에서는 일찍 도입부터 기호의 배열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흑백 대비의 연속된 포토그라피는(아마도 주인공의 작품들인 듯) 흑색과 백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지지만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공공연하게 백색이 더 강조 된다. 이를테면 백인 여성이 검정 옷, 검정 선글라스, 검정 모자를 착용하고서 목줄을 맨 개를 데리고 걷는데 본래 그런 종의 개는 유색일 텐데도 사진 상에서는 아주 흰 색이다. 흑백으로 현상되었기 때문이다.
즉, 본래는 컬러가 있는 개인데도 흑백사진인 덕택으로 흰색 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호는 복합적 의미를 띤다. ‘개도 흰색이어야 하는가?’ 라는 반감으로부터 이내 ‘우리는(유색인인 경우) 흑백 영상일 때 안정감이 든다’는 동질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화된 흑과 백의 논리를 체험케 한다.
컬러 화면으로 바뀐 아침 장면, 주인공 크리스가 면도를 할 때 면도기가 흰색인 것도 특이하다. 쉐이빙폼이 흰색인 것은 그렇다 쳐도 그의 검은 색 피부에서 털을 깎아내는 면도기가 흰색인 것은 이상할 정도로 피부색과의 대조를 이룬다. 이 친구는 백인이 되고 싶은 것일까?
어쨌든 이 흑인 사진작가 크리스가 백인 여자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는 여자 친구의 지적인 백인 집안 일가와 그들의 백인 친구들이 심리학적이면서도 생물학적인 기술을 동원해 탐스럽고 건강한 흑인의 육체를 강탈하고 백인 자신의 정신을 이식해서는 영생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흑인은 신체적으로는 이용당하고, 정신은 죽는다는 게 이 영화의 요지이다.
따라서 <겟 아웃>(Get Out)이란 말 그대로 “떠나라!”는 교시인 셈이다.
감독은 물론 흑인이다.
2. 미국 내 산상수훈의 두 뿌리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만약 링컨 대통령이 살아서 이 영화를 본다면 뭐라 말했을까? 흑인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까지 그가 원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저렇게 숙고된 기호의 배열들을 오로지 흑과 백의 대비 속에서, 특히 흑의 피해의식으로 점철시키더니 이내 그것은 미합중국 대통령이 흑인에서 백인으로 교체된데 대한 개탄과 절망 그리고 자조를 피력하는데 다 소진을 해버린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흑인인 전임 대통령과 백인인 현 대통령은 한 영토 내의 다른 나라 대통령들인가 아니면 한 나라의 다른 인종을 대표하는 대통령인가? 이런 근본적 이질감이 링컨 대통령을 불러 올린 것이다.
역사수정주의자는 남북전쟁의 발발을 남북 간 노동시장의 불균형이지(노예들이 남쪽에 몰려있었다고 한다) 인권이 모토는 아니었다는 궤변을 좋아하지만, 링컨은 여전히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히는(2015년 美 정치학회) 대통령이며, 특히 그가 재선 취임 연설에서 언급했던 다음 맥락은 국가로서 미국의 핵심 국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테제는 남북전쟁이라는 흑과 백을 놓고 벌인 유혈의 화급한 시국에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도 서로 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였습니다…<중략>…사람이 다른 사람 얼굴 위에 흐르는 땀으로부터 자신이 빵을 착취하기 위해서 정의의 하나님 도움을 구하려 한다면 미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생략>”
보다시피 기독교 성서 맥락 그대로, 특히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위대한 설교로 꼽히는 산상수훈 중 결론부가(마 7:1) 골조를 이루고 있다. 이 테제는 다양성의 질서를 정리하여 지금의 균형에 올려놓았다 해도 과언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이 중심 사상의 뿌리에서 나온 대통령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바마 대통령 초선 및 재선 당시 대부분의 뉴스 헤드라인들은 다음과 같은 문안 일색이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 가장 존경” – 뉴스앤조이(2006. 10.18)
[오바마 대통령 취임] 40년만에 이룬 ‘마틴 루터 킹의 꿈‘ – 미주 중앙일보(2009.1.19.)
‘오바마’, 환호 속에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재연 : 미주·중남미 : 기독일보(2013. 8.29)
물론 마틴 루터 킹의 신앙 뿌리를 미국의 설립 가치와 유리시키는 관점이 넌센스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러한 관점은 결코 낭설이 아니다.
지난 2006년에 작고한 인문학의 거장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자신의 역작 ‘Jesus Through the Centuries’에서 마틴 루터 킹의 신앙의 핵심 가치를 링컨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신앙 가치와는 다른 루트로 지목한 일이 있다.
그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남아프리카의 한 젊은 변호사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통해 그 루트를 발견한다.
“나는 오래 살면 살수록,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지금 내가 특별히 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또 내 생각에 극히 중대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은 무저항주의(nonresistance)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모든 오해와 왜곡을 떠난 사랑의 가르침 자체입니다….이 법은 인도, 중국, 유대, 그리스, 로마 등 세계 모든 성인에 의해 전해졌습니다…기독교 문명 전체는 표면적으로는 극히 찬란하지만, 그것은 (해방자로서 예수의 참된 가르침의) 명백하고도 미숙한 오해 위에서, 그리고 무의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의식적인 오해 위에 성장해 왔습니다…. 열아홉 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독교가 필요하다든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를 지지하는 군대나 폭력을 인정한다든지 하는 명백한 모순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한 모순은 조만간 아마도 곧 백일하에 드러나고 종지부를 찍을 것입니다. ‘당신의 영국, 우리의 러시아’에서…”
톨스토이가 죽기 2개월 전에 쓴 이 편지는 수신자인 그 남아프리카의 젊은 변호사가 톨스토이의 저서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하나님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아직도 그 인상이 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의 독립된 사고, 깊은 도덕, 그리고 신뢰성 앞에는 다른 모든 기독교의 책은 빛바래고 무의미한 것 같았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톨스토이에게 보내온 것에 대한 답장이었는데, 그 변호사는 인도 태생으로서, 다름 아닌 모한다스 간디(Mohandas K. Gandhi)였다.
이 루트를 추적한 펠리칸은 마틴 루터 킹이 신학교에 들어간 해가 톨스토이에게서 비폭력 저항을 전수 받은 간디가 세상을 떠난 1948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신론(神論) 관련 학위논문 도서목록에는 다른 신학생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마하트마 간디의 저서들이 포함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미국 시민 마틴 루터 킹은 노예 해방자 링컨의 후예인가, 비 기독교인 간디의 후예인가? 물론, 간디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마 5:39)는 산상수훈을 몸소 실천한 톨스토이의 저항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리 하여 단일의 산상수훈이 한 나라 안에서 두 뿌리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노예해방인가 흑인해방인가?
영화에서 우스운 장면이 하나 눈에 띄었다.
완전히 백인들로만 구성된 파티에 주인공 크리스가 불가피하게 참석했다. 온통 흰색이었다. 그런데 그중 두 명의 유색인도 있기는 했다. 한 명은 백인처럼 행동하는 흑인. 다른 한 명은 동양인이었다. 대담하게도 동양인이 크리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 질문 자체는 두 가지 의미를 띠는데 일본인으로 소개한 이런 종의 동양인은 한때 미국의 경제 가치에 도전하고 위협했던 일본의 버블 경제를 비꼬는 것일 수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동양인을 흑인보다 화이트에 가까운 지위로 보는, 도저히 현실에서 동떨어진 피해의식의 절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종차별을 논하자면 과연 동양인이, 이를테면 한국인이 흑인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할까? 버블 경제를 비꼰 것처럼 일정한 수준과 지위를 구가하는 유색인종의 지위는 언제나 경제력과 비례한다. 경제력을 갖추었을 때는 동양인뿐 아니라 흑인들도 자유로운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인습 속에서의 동양인은 어정쩡한 컬러일 뿐인 것이다. 오히려 흑인은 컬러풀하다.
따라서 영화에 배인 이와 같은 넌센스는 자신들의 국가인 미국의 건립가치를 대변하는 ‘노예해방’을 ‘흑인해방’으로만 오인한 데서 비롯 된다.
노예해방은 흑인해방이라는 낮은 단계의 이념보다 높은 이념이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을 흑인해방으로 점유하듯, 과잉된 이 해방의 원리는 오바마 임기 당시에 절정을 이룬 해방의 신개념 ‘PC’가 바로 그것이다. 오바마 다음 대통령인 트럼프의 당선 당시 언론은 “PC의 끝장”이라는 언급을 자주했는데 PC란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공정성)의 약자로서 다음과 같은 개념이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주창하는 이 개념은 성차별/인종차별에 준한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 잡겠다는 기치로 시작하여 이른바, ‘마이너리티’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시정케 하는 캠페인으로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전개되다가 오바마 당시에 절정에 달한 것이다.
가령, ‘불구자(disabled)’를 ‘장애인(handicapped)’으로 부르는 것이 그 예인데, 미국에선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 ‘능력을 달리 타고난(differently abled)’으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체적으로 도전받은(physically challenged)’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런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선 ‘장애우’라는 말이 등장했다. 참고로 대표적인 PC 표현법이다.
black→African-American, Oriental→Asian-American, Indian→Native American, housewife→domestic engineer, fireman firefighter, stewardess→flight attendant, postman→post person, policemen→law enforcement officer, prostitute→sex surrogate, human·mankind→earth children, blind→optically darker, deaf→visually oriented, poor→economically unprepared, drug addict→chemically challenged, bald→ comb-free.
뿐만 아니라 이들은 그간 대학에서 가르쳐 온 ‘위대한 책들’이니 ‘걸작’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소수 인종 문학 텍스트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나이에 대한 차별(ageism),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heterosexism), 외모에 대한 차별(lookism),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ableism) 등 그야말로 말그대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갔다.
오바마 임기 내에 “종교적 이유로 술 배달 거부로 해고된 무슬림에게 약 3억 배상 판결”이 났다든지, 미국에서 동성애자 결혼이 합법화 된 것은 그 확장된 외연의 극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오바마가 당선되기 이전에 이미, 탈 권위 탈 기득권의 대명사로 꼽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권 변호사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 있다. 공교롭게도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남북전쟁 종식을 눈앞에 두고 했던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 연설문을 읽으면서 ‘정의를 내세워 승리한 사람’을 발견했다. 링컨은 선거에서 숱하게 떨어졌다. 대통령 재임중에는 누구보다도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노예제 폐지론자와 노예 소유자들이 모두 그를 공격했다. 인기도 없었다.”(「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노 대통령께서 마틴 루터 킹이 아닌 링컨의 재선 취임 연설문에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에이브러햄 링컨의 재선 취임 연설문 전문
따라서 이글의 마지막으로 에이브러햄 링컨의 재선 취임 연설문 전문을 옮겨보고자 한다. 특별히 노무현 대통령께서 읽으셨다는 「월간조선」의 버전 그대로를 옮긴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대통령직 취임 선서를 위한 본인의 이 두 번째 자리는 첫 취임 식 때처럼 긴 연설을 할 계제가 아닙니다. 첫 취임식 때에 본인은 우리가 과연 어떤 길을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다소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이 나라의 모든 눈과 힘은 여전히 남북 내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만, 지난 4년 간 남북 갈등에 관한 모든 문제와 모든 국면들에 관해서는 이미 수많은 공식 발표문들이 나왔기 때문에 본인이 지금 새삼 꺼내놓을 말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 모든 것은 전쟁의 진행 상황에 달려 있고 그 戰況(전황)은 본인은 물론 모든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현재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대체로 만족스럽고 고무적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높은 희망을 갖지만 어떤 예측도 할 수 없습니다. 4년 전 이맘 때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임박한 內戰에 쏠려 있었습니다. 모두가 전쟁 발발을 두려워했고 모두가 전쟁만은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취임사를 하면서 본인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미(美) 연방을 「구출」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이 도시 한쪽에서는 반란자들이 전쟁 아닌 방법으로 연방을 「파괴」하는 방안, 곧 합중국을 해체하고 협상을 통해 나라를 쪼개자는 안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 반대하기는 양쪽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한쪽은 연방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연방을 죽이기보다는 전쟁이라 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나라 인구의 8분의 1이 흑인 노예들입니다. 그들은 이 나라 모든 지역에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부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노예 소유는 특수하고도 강력한 이해관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이해관계가 남북전쟁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그 이해관계를 강화하고 영속화하며 확장하려는 것이 바로 반란자들의 목표였던 반면, 정부는 그 이해관계의 영토적 확장을 제한해야 한다 는 것 이상의 주장은 한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전쟁이 이처럼 규모가 커지고 이처럼 오래 계속되리라고는 어느 쪽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쪽도 남 북 갈등을 초래한 「원인」이 전쟁 종식의 순간에, 혹은 전쟁 종식 이전에 제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모두 손쉬운 승리를 기대했을 뿐 이처럼 근본 적이고 놀라운 결과가 초래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서로 상대방을 응징하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있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남이 흘린 땀으로 자기 빵을 얻는 자들이 감히 정의로운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심판하지 않도록 합시다. 남북 어느 쪽의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쪽도 하나님의 충분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여라. 이 세상에 죄악의 유혹은 있게 마련이나 남을 죄 짓게 하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도다.』 미국 의 노예제도가 바로 그 같은 세상의 죄 가운데 하나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있게 마련인 죄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러나 하나님이 정한 시간 동안 지속된 그 죄를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거두시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죄를 짓게 한 자들로 인한 재앙을 징벌하고자 하나님께서 남과 북으로 하여금 이 끔찍한 전쟁을 치르게 하신 것이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언제나 그 분의 것이라 생각하는 그 신성한 뜻이 아닌 다른 어떤 뜻을 우리가 이 전쟁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 거대한 재난의 전쟁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품삯 한 푼 주지 않고 노예의 땀으로 모은 250년의 재산이 모두 다 탕진될 때까지, 3천 년 전의 말씀이 이르듯 채찍으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한 자가 스스로 칼에 맞아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자기 피로 되갚게 되는 날까지 이 전쟁을 지속시키려 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도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원한 갖지 말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보게 하신 그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안겨진 일을 끝내기 위해, 이 나라의 상처를 꿰매기 위해, 이 싸움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과 그의 미망인과 고아가 된 그의 아이를 돌보고 우리들 사이의, 그리고 모든 나라들과의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모든 일을 다 하기 위해 매진합시다.
에필로그.
이 노예해방의 가치를 노무현 대통령께서 정치 기반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사실인데, 하지만 그가 부재하는 지금은 두 가지 넌센스에 봉착해 있다. 그분의 이름을 기치로 내 거는 후예들은 노예해방보다는 흑인해방에 더 가까운 표지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 왜냐하면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한국형 PC가 발권되려 하는 시기이기 때문.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우리나라에는 흑인해방이 화두가 될 만큼의 흑인이 많지를 않고, 사실상의 노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모순은 한국형 귀족 노예라는 낯선 인종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흑인문학의 한 저명한 학자는 이런 질의를 던졌다고 한다.
“왜 마틴 루터 킹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왜 그의 철학을 받아들였는가?”
그 대답은 주저 없이, 링컨의 연설문과 톨스토이의 편지에 내재된 산상수훈의 저작권자 예수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힘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고.
그럼에도 우리주변에는 이 산상수훈을 마르크시즘과 접목하는 변종이 더 많이 출몰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