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혼사용설명서’의 정갈한 서평 하나가 눈에 띄어 옮겨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데 아니마>를 풀어낸 책이다. 저자인 이영진 교수는 아리스토 텔레스의 철학적 안목으로 성경과 접목시킨다. 그는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저 멀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만질 만한 것들에 관해 전개된다는 점에서 바쁜 우리의 안목을 끌기에 충분하다.”(5쪽)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념이 아닌 실물을 다룬다. 사회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가져온 것을 보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무엇이다. 저자는 17부터 19세기까지 전성기를 이룬 인간학에 주목한다.
니체의 신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며, 인간의 존엄은 신의 존엄이 해체당하면서 같이 해체당했다.(7쪽) 합리적 사고로 달성한 서구의 문명은 문명은 발달 시켰지만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박탈감, 일상의 파괴, 인간 존엄의 퇴행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야만 시대’로 진입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럼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참 인간을 바로 보기 위한 시도인 셈이다.
“따라서 성서가 정지된 문서가 아니라면 그것이 우리의 삶 속의 언어일 때 그 의미가 계속해서 일어서듯, 그 언어를 일으킨 역사적 주체들의 삶의 언어를 평행하게 읽을 때 간과되어 왔던 의미들은 더욱 격하게 일어설 것이다.”(11쪽)
목차를 보면 영혼 사용설명서가 아닌 신체 사용설명서처럼 보인다. 영양섭취능력, 감각능력, 운동능력, 욕구능력, 사고능력, 상상능력, 윤리능력. 이렇게 7가지 주제로 나누었다. 특이한 점은 각 장의 부제에 ‘왜’를 삽입하여 근원적 이유를 묻는다. 좋다. 한 챕터를 집중에 들어가 보자. 1장의 첫 주제인 ‘나는 왜 먹는가”를 살펴보자.
먹는 것은 육의 갈망인 ‘배가 고파서’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34쪽)가 옳다.
“배고픔보다 앞서 선구조 속에서 영혼이 영양섭취라는 운동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영양섭취의 동인이 아니라 영양섭취가 배고픔의 동인인 것이다.”(34쪽)
배고픔은 몸이 영양섭취를 원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즉 배고프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견해로 판단해 보건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목적인이 아닐까? 저자가 말한대로 ‘언제나 자연은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하며 그 목적은 바로 그 자신의 최종적인 완료지점이다.”(40쪽)
존재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 이어진다. 철학적 사유가 많은 만큼 성경적 통찰이 미미한 것이 아쉽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나를 일깨운다. 저자의 통찰은 몸과 영혼을 분리시키지 않았던 구약적 전통과 일치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칼 막스의 주장은 관념에 갇힌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기독교는 관념과 현실을 분리하지 않는다. 샤마임과 에레츠는 서로 잇대어 있고, 에레츠는 샤마임을 표방하고, 샤마임을 에레츠를 품는다.
출처: http://392766.tistory.com/2875 [정현욱목사의 팡세(Pensé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