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태초에 빛이 있었다” 하지 않고 “태초에 행위(리듬)가 있었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태초에 빛이 있었다”란 기독교 성서 가운데 구약 부분의 가장 첫 책에서 천지창조를 상징하는 명제인데,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개정된 기치로 언어(λόγος)에 천착함으로써 응답했다. 괴테는 이를 한층 실존적으로 격상시켜 ‘죄’라는 인간의 불가항력적 본성을 입혀 응답한 것이다.
그 태초에 행위가 창조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가정할 수 있다.
1. “감각에 속해 있지 않았던 ‘지각인 것’은 없다.”
2. 우리 인식은 하나의 먼 기억에 의존한다.
3. 겪었던 어떤 느낌을 회상 시키는 순간에야 무엇인가 의미케 된다.
4. 아는 것만 본다.
5. 어떤 사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때 그것의 존재를 받아 들이지 못한다.
6. 하나의 메시지를 해독하는 것은 곧 상징적 한 형태를 지각하는 것이다.
7. 그러므로 장차 감정으로 인식될 먼저 존재했던 그것들(놀람이나 두려움이나 믿음이나 사랑 그런것들)과 환경(맹수나 가난이나 그런 것들) 사이에서 인간은 몸짓으로 존재했던 것뿐이다.
8. 언어는 거기에 입혀진 것이다.
9. 그런 점에서 인간은 들숨과 날숨의 반복 속에서 떨어져 나온 외침으로서 한 존재인 것이지 자기네끼리 스스로 만들어낸 생명이 아니다.
10. 이것이 기독교인에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인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이렇게 써야 하지 않을까.
벌써 여기에서부터 막히다니!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
‘말씀’이라는 낱말을 과연 이렇듯 높이 평가해야 하는가.
정령의 깨우침을 받았다면,
이 낱말을 다르게 옮겨야 한다.
“태초에 ‘뜻’이 있었느니라!” 이렇게 써야 하지 않을까.
네 펜이 경솔하게 서두르지 않도록
첫 행을 심사숙고하라!
과연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것이 뜻일까?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 이렇게 쓰여 있어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이것을 쓰는 동안에 벌써 뭔가가 미진하다고 경고하는구나.
정령이 도와주는구나! 불편듯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자신 있게 쓰노라.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Im Anfang war die Tat!”)
― 괴테의 「파우스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