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임시 정부’ Vs. ‘임시정부’ 

‘임시’라는 말은 명확한 기한을 정하지 않은 잠시 동안의 상태를 이르는 명사이다. ‘정부’라는 단어와 함께 쓸 때는 둘 다 명사이므로 띄어쓰기를 해야 하나, 그 임시 정부가 어떤 고유성을 띨 때에 한하여 그것은 ‘임시정부’라 붙여 써도 마땅할 것이다. 이 글은 이 문법적 고려를 가해서 쓴 글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설립된 조직이다. 이 기구는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처음 설립된 단체로서 3·1운동이 개시되고서 1개월 뒤에 결성한 단체이다. 3·1운동의 여세로 5개월 뒤에는 각지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경성(京城)에서 벌어진 3·1운동이 없었으면 단지 ‘임시 정부’로 머물렀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임시 정부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소리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는 명칭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고안한 것은 신석우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고종(高宗)이 지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과 연관성을 갖는 문제에 대해 여운형이 망해먹은 ‘대한’이란 이름을 왜 쓰느냐고 이의를 걸었으나 ‘망한 이름으로 흥해보자’고 밀어부쳐 ‘대한민국’이 되었다 한다.

임시 정부와 이승만

바로 이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들이 통합될 때 그는 부재한 상태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그의 외교력, 즉 우드로 윌슨과의 친분을 고려해 추대되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이미 4월에 한성 임시 정부의 총재로 추대받자 워싱턴에 임시정부 총재 집무실을 열어놓고 대외적으로 (통합) 대통령 행세를 해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였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그를 뽑은 것은 상하이 임시 의정원이었는데,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그가 거주하고 있는 워싱턴에 발송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5년 뒤인 1925년에 그는 임시 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다. 발단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라는 해외 기구에 우리나라 통치를 위임했다는 사유였다.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이완용보다 더 한 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면직당했다. 하지만 반(反) 이승만 전선은 ‘위임통치’라는 단어만 전파했지, 그 국제연맹이 우드로 윌슨이 만든 기구라는 사실은 누락한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1918년 1월 8일 미국 국회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팽창을 막고 세계평화와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14개조를 연설한 일이 있는데, 이 14개조항이란 우리나라 같은 약소국에는 더 없이 중요한 독트린이었다. 그 요지는 제국 간의 비밀조약 파기, 항해의 자유 보장, 국가들 간의 관세장벽 해제, 군축,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자결과 자치권’이라는 대목이었다. 바로 이 ‘민족자결주의’가 우리나라 같이 식민 치하에 놓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윌슨 대통령은 연합국과 대결하고 있던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에 속한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것이었으나 미국에 거점을 둔 이승만 등 세계 정세 파악에 밝았던 지도자들은 이 원칙을 바로 우리나라에까지 강력하게 적용시키는 외교의 노력을 펼쳤던 것이다. 게다가 우드로 윌슨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승만의 스승이었다. 위탁통치인가 외교인가, 여전히 다툼의 여지가 있다.

3·1운동 정신의 피로감과 새로운 독립 전선

3·1운동의 흥분이 천년만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든 국외든 피로감에 젖어들기 마련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일제의 박해 내지는 친화 정책으로 이탈자가 속출하고 있었고, 해외에서는 생활형 독립운동가들의 끊임없는 파벌 싸움으로 평소 애국적인 동포들도 신물을 내고 있었던 터이다.  이러한 피로감 속에서 기회가 찾아 왔다.  일본이 미국 본토를 때린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이 일본에게서 기습 공습을 받았다. 미국이 어떤 나라로부터 본토가 침공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시 정부는 3일 후인 1941년 12월 10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뭔 힘이 있다고? 라고 말하지 말라) 미국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것임을 예상해서였을 것이다. 이때 애국심 있는 재미 한인들에게도 새로운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재미 한인 단체들은 앞뒤를 다퉈 미국에 충성을 다짐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것은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활동으로 나타났는데 이른바 ‘US War Bond’ 즉, ‘미국 전쟁공채’를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 한인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무려 50만 달러를 구매하였다고 한다. 1941년대의 50만 달러이다.

이 액수는 한인 개인당 약 2천불에서 3천불에 달하는 액수였는데, 이는 1900년대 초 노동이민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기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날은 ‘친미’라는 용어로 이러한 친화적 동력을 격하시키지만 미주 한인의 이러한 친화력은 1900년대 같은 이주 동양인이었던 일본인과는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처신이었다. 일본인은 한인보다 좀더 일찍 이주한 종족이었는데 이들은 기독교로 쉽게 개종한 한인과는 달리 자국의 불교 내지는 신도(神道/ 신토)를 좀처럼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2세들의 미국 동화작용까지 방해하는 사회 행태로 나타났는데, 미국 사회에 동화력을 갖춘 한인들이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간직하고 있는 양상과는 달리 당시의 일본인의 조국에 대한 열정은 무조건적 충성심에 기인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이 두 인종에 대한 미국 사회의 처후를 가른 것이다.

당시의 일본인은 한인보다 지위가 더 좋았음에도 전쟁이 터지자 미국 사회는 일본군이 미국 서해안에 상륙한다면 미국 거주 일본인들은 모조리 일본군을 도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여론은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행정명령 9066’을 발동시키게 했다. 이 행정명령이 뭐냐하면, 미국 서부지역의 약 11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을 서해안에서 떨어진 중부사막 수용소들(relocation camps)로 보내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까지 무려 3년 반 동안이나 감금을 시킨 일이다. 인권의 나라에서 어찌 이런 처후가 발생했느냐. 전쟁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자기 자녀를 미국에 보내 공부시키거나 아예 미국 시민권자로 만드는 반미주의자는 이런 걸 잘 말하지 않는다. 모르고 있거나.

정부가 될 기회를 놓친 ‘임시 정부’

한인들은 요인암살, 테러 등을 불사하여 실질적 무력투쟁을 명분으로 삼는 임시 정부(들)의 지지부진함과 끊임없는 분쟁 그리고 파벌싸움에 후원하는 것보다는 제2차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는 연합군을 지원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이라 여겼다. 게다가 전 연합군의 최종 병기고이고 인적, 물적, 모든 면에서 자원이 무한한 미국의 승전 가능성이 높고 또 그들이 세계의 헤게모니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국 광복의 동력으로서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리하여 한인들은 광복군을 위한 독립금, 혈성금, 인구세 등 임시 정부를 위해 모금했던 액수의 수십 배를 더 미국 전쟁공채를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노동이민으로 온 자신들에게 영사도 하나 보내주지 않던 나라, 그토록 부르짖던 호소에도 외면하던 조국에 애정이 흐릿해지다가 이 전쟁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이다. 애국심이.

한편 임시 정부는 구미외교위원부라는 기구를 두고 있었다. 1919년 8월 임시 정부 설립 당시 워싱턴에 설치하여 미국, 유럽 등을 상대로 외교를 주무하는 용도였다. 그러나 1925년 구미외교위원부의 2대 위원장이었던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하면서 이 기구를 그의 사조직으로 분류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는 철폐시킨 기구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의 임시정부란 ‘임시 정부’였기에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속개했다. 그러던차 임시 정부는 1934년 다시금 이승만을 외교위원으로 선출한 터이다. 모지? 어쟀든.

그렇다면 임시 정부와 주미 외교위원부는 2차세계대전으로  찾아온 이 절호의 독립의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러지를 못했다.

미주 한인을 중심으로 미국전쟁공채 구매 등 적극적 의사 표현에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임시 정부는 궁극적으로 ‘참전’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게는 이 전쟁이 자국을 방어하는 전쟁이었겠지만, 이면에서 이 전쟁은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전쟁이었기에 약소국들은 너도나도 참전을 선언하고 있는 분위기인데도, 진주만 공습 3일만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한국 임시 정부가 참전 선언은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미국의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은 이승만이 중경 임시 정부의 워싱턴 대사인 것까지는 인정하였지만,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는 끝끝내 ‘임시정부’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대변인 역이던 크롬웰(James Cromwell)은 1942년 6월 23일 임시 정부 승인을 위해 미국 국무성과 더 이상의 대화를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결론을 내린다. 대체 왜 그리되었을까? 이승만이 소극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광복군은 마지막 순각까지 적극적인 참전의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일부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의사들을 통해 무력 테러는 있었지만, 이제 비로소 전쟁다운 전쟁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정작 일본과의 접전에 나서지 않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이는 다른 약소국의 상대적인 반응에서 드러난다. 당시 연합국들과 더불어 참전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정부’로 인정을 받는 기회였다. 왜냐하면 파시즘이 기세를 떨칠 당시 ‘임시 정부’는 우리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식민지 및 종속국들은 반 파시즘의 기치 아래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 가운데서 이를 테면, 줄기차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티토(Josip Broz Tito)는 연합군에 참전함으로써 우방임을 인정받았고 전쟁 후에는 그 세력을 유고슬로비아 독립국으로 인정하였던 사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 광복군은 참전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용감하던데.

이로써 결과적으로 상해 임시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해외 거점을 두고 한인을 대표하는 여러 한인 단체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만약 중경의 ‘임시 정부’만을 정부로 인정한다면 다른 단체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사유를 스스로 제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상해에서 독립금, 혈성금, 심지어 인구세 등의 명목으로 각지의 한인들에게서 거둬갔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기원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과 접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전에 대한 어떠한 구두 천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종전이 되었다. 당시 재미 한인 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한족연합위원회는 중경 특파원을 보내 중국 한인을 항일 전선에서 적극 참가하게 하여 미국 정부로 하여금 상해 임시 정부를 교전국 정부로(연합군 일원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아야 정부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으나 광복군은 아무런 접전 없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 뉴스를 맞은 것이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표 김구는 이르기를, 임시 정부와 광복군은 한 일이 없어 앞으로 발언권이 약하게 되었으므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전한다. 실제로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해방된 경성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입성하지를 못 하였다. 임시 정부 대표들은 모두 다 개인 자격으로 미소 양군이 점령하고 있는 38선으로 분단된 조국에 돌아왔다.

현대에 들어 대한민국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대다수는 그 임시 정부를 ‘김구의 임시 정부’로 기억하는 까닭일 것이다. 김구를 위대한 선각자로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던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임시정부로서의 권위를  ‘김구의 임시 정부’로 기억하는 한,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고정관념은 당시 함께 공존했던 여러 임시 정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사실의 반증으로 작용하는 모순에 봉착할 것이다.

‘임시 정부’가 아닌 ‘정부’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부의 궁극적 요체는 ‘군사력’에 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는 세상에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현대적 의미로서의 전쟁이란 일종의 진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외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현대만이 아니라 과거 임시 정부 때도 그랬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나라는 2차세계대전 당시와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지정학적인 이유로 열강의 틈에 끼어서,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이념의 갈래에 끼어서, 언제나 가장 많은 피를 흘리는 당사 국인 우리 자신은 결정적 상황에서 스스로의 당사 국 지위를 내려놓는 민족성을 보이는 것이다. 혹시 자주독립을 꿈꾸며 광복의 동력을 연합군에게 내주고 만 것이었다면, 자주독립을 위해 그렇게도 사드(THAAD)의 해체를 부르짖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주독립이라는 술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외교력이 없는 국가에서만 돋보이는 용어일 수 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역사적으로 스스로 독립을 이룬 나라란 없다. 있다면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독립을 할 필요가 없었거나, 아니면 전혀 가치가 없는 땅을 영토로 딛고 있었거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필연적으로 힘 있는 누군가가 주권을 부여해 줄 때에만 비로소 독립은 성립될 수 있었다. 그것이 역사이다. 그게 아니라면 ‘임시 정부’는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임시 정부’란 말을 써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임시 정부는 그렇게 임시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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