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자신의 죽음

이 글의 제목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자신의 죽음’은 페친이신 모 인터넷 저널 편집장께서 엊그제 올린 글을 읽고 내 뇌리의 잔상으로 남아 있는 형태소 그대로를 담은 제목이다. 이런 글이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최후의 선물은 바로 부모 자신의 죽음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의 죽음을 통한 보호자 그리고 유년 시절과의 최종적 결별, 이게 없으면 인간은 독립적인 성인이 되지 못한다. 부모의 죽음을 내면화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개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경우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민폐를 끼치는 역할을 하기 쉽다. 나 역시 그 내면화를 진행하는 과정이다. 며칠 지났지만, 어버이날을 계기로 해보는 생각이다.

모 인터넷 신문 편집인 (글이 어디로 갈 지 몰라 익명으로 하였으니 양해 바랍니다)

보다시피 원글은 ‘최후의 선물’이지 ‘최고의 선물’이 아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따르면 실수행위는 진실행위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형태소로 인해 두 번째 놀란다.

첫 번째로 놀란 것은 저 글을 읽자마자 였는데 일전에 내가 적어 놓은 글을 쓸 때의 감성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뒤졌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최후의 선물’이 ‘최고의 선물’로 둔갑한 것은 그렇게 한참을 뒤지는 과정의 산물 같다. 마침내 그 글을 찾았다. 이런 내용이다.

월요일에 발생한 두 가지 무례한 일로 마음이 언짢아 있다가, 오늘 온 나라를 들썩이는 촛불 집회/ 태극기 집회 뉴스로 인해 언짢은 마음이 월요일의 무례함 그대로 굳어버렸다.

우리는 마음이 언짢을 때,
촛불 집회 혹은 태극기 집회 라는 사건이 언짢게 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오랜 언짢은 기억이 그 사건/사고들을 채용하고 사용하는 것인가.

각자 자신이 어떤 이념을 선호했든 언짢은 마음이었을 것으로,
이로써 우리가 유전적 한국인임을 안다. 귀화 한국인이 느끼지 못하는 기분이나 마음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나 개인에게 혹은 우리에게 있는 유전자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유전자란

유대인에게는 전통이었을 것이며,
데이비드 흄에게는 습관이었을 것이며,
프로이트에게는 신경망에 새겨진 포비아였을 것이며,
현대 뇌과학에 있어서는 뇌수 속에 잠겨있는 유령일 것이다.
이 유전자를 극복하는 일에 미래가 달려있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일본의 하천풍언은 첩의 소생으로 태어나 눈에서는 진물이 나며 선천적으로 허약했으나 자신은 기생을 첩으로 두었던 아버지의 (더러운) 피를 닮지 않겠다며 온갖 각고의 희생과 헌신으로 마침내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그런가 하면, 노던 댄스라는 경주마는 참가하는 경주마다 놀라운 성과를 냄으로써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비 말과 연결된 그 모든 종마의 몸값을 갈아치웠다.

이것이 우리가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유전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글을 찾아 복기하면서 다음 세 가지를 느낀다.

(1) 이 글에 나오는 ‘무례함’이란 아마도 임용한 강사가 마음에 안 든다는 학생들의 컴플레인과 나 역시 그 강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일 같은데 참으로 거창하게도 써놓았네.

(2) ‘최후의 선물’을 ‘최고의 선물’로 수정한 내 기제는 그 선물이 내 부모의 죽음이란 소리인가, 아니면 부모된 나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가.

(3) 결론은 이것이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

“우리는 부모가 우리에게 준 상처 때문에 분노한다. 부모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을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직 분노하는 이유는 사랑을 받고 싶어서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다.”

김혜남. <어른으로 산다는 것>(2011, 걷는나무) 13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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