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를 덮친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윈스턴 처칠로 분한 게리 올드만.

플라톤은 인간이 구현하는 정치·사회체계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왕/군주 일인이 통치하는 군주정(Βασιλεία),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귀족정(Α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다수가 정치를 주도하는 민주정(Δημοκρατία). 아울러 그는 이러한 체제들이 각각 그 일인의 폭정(τύραννος), 소수 엘리트만의 과두정(ἀ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다수의 우민화를 통해 중우정(ὀχλοκρατία)으로 변질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인이 지배하는 군주정과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귀족정, 그리고 다수의 민주정이 공존하는 혼합정치가 분명 존재하며 바로 그 혼합의 왜곡에서 폭정, 과두정, 중우정으로 나타난다고 개정하였다.

1938년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뮌헨 회담 장소로 가는 모습

이들보다 한 세기 뒤에 태어나 활동한 역사가 폴리비우스(Polibius, BC 200-118)는 이들의 정치이론에 발전론을 입혀서 체제의 몰락이란 군주정에서 폭정으로, 귀족정에서 과두정으로, 민주정에서 우민화로 퇴행하는 데서 기인하기에, 로마 제국처럼 군주정에서 귀족정으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하는 것이 제국의 안녕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면서 그 혼합의 시스템으로서 ‘공화정’ 곧 집정관, 원로원, 호민관으로 구성된 체제를 그 완전체로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 완전체조차도 몰락을 할 때는 각각의 머리로부터 썩어 들어갔던 것을 감안하면 플라톤의 근원적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며, 또한 그 체제의 운용면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연(敷演)했던 이상의 다른 혼합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파시즘(fascism)의 등장을 통해서였다.

군중에게 연설하는 무솔리니

파시즘(Fascism/ fascismo)은 ‘묶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시오(fascio)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이 파시오란 고대 로마의 정무관이 들고 다녔던 파스케스(fasces)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럼 대체 이 파스케스가 뭐에 쓰는 물건이냐. 파스케스는 막대기를 여러 겹으로 묶어서 그 끝에다 도끼를 달아놓은 일종의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는 상징물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체벌이나 처형에도 사용되었으며 그 상징(물)이 기표하는바, 파시즘이란 한마디로 집단주의의 총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1인 독재자를 지칭하는 말로 전용되지만 실상 역사적으로는 ‘노조’(노동조합)를 이르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un fascio/ 1910).

파스케스를 든 집정관 모습.

이 일단의 결속주의(結束主義)는 정치적으로 적용될 때 국가주의, 국수주의적 색채 속에서 급진적 성향을 띠기 마련인데, 여기서 응용해 뻗어 나온 것이 바로 나치즘(Nazism)이었다.

새롭게 인종적 어프로치를 한 셈이다.

아돌프 히틀러

고대 로마 사회에서 폴리비우스가 자부하던 정치 발달 체제는 썩어 몰락하였음에도 그 어느 것 하나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며 도리어 새로운 혼합의 옷을 입고서 근대 전유럽을 활보하였고, 이는 어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무솔리니와 히틀러라는 인물을 통하여서 아주 실제적이면서도 막강한 위력이 되었다. 다른 말로하면 왕도 없어지지 않았고, 귀족체제도 없어지지 않았으며, 다수와 혼합된 채 폭정, 과두정이 그대로 살아서 새로운 변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시대가 윈스턴 처칠이라는 인물을 불러냈다.

전쟁에 패전한 지휘관이었고, 인격적으로는 괴팍하기 짝이 없어 정치적 동반자도 없이 소외된 채 늙어 가고 있던 한 노인을 왜 다시 불러냈을까. 이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가 어느 정도 가까이서 그에 관한 근접/접사 촬영을 해 놓고 있다.

처칠의 웅얼대는 발음까지 훌륭히 연기해낸 게리 올드만.

윈스턴 처칠을 불러낸 이유는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저 파스케스(fasces)의 악을 일찍부터 파악을 하고서 시종일관 예언자의 목소리를 낸 정치인은 윈스턴 처칠뿐이었다는 사실.
둘째, 저 파스케스 악에게 모조리 패하거나 항복하여 유럽 전역이 두려움에 압도되어 떨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무릎을 꿇지 않음으로써 그 악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한 유일한 유럽 정치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 폭정·과두정·중우정의 왜곡된 혼합이 탄생시킨 저 파스케스 악은 진정한 민주주의 곧, 왕·귀족·다수가 다같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영국 민주주의의 힘으로 파쇄시킬 수 있다는 그의 결기와 확신.

의회 당직자들에게 연설을 통해 사전 설득을 하는 처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곧바로 냉전의 시대로 진입한다. 냉전의 시대(Cold War Age)란 앞서 저 악의 막대기 묶음을 무찌르기 위해 동맹에 참여했던 소련을 중심으로 동구권 전역이 공산주의 전선으로 재편된 시대를 말한다. 그 막대기 묶음이 공산주의로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냉전의 시대마저도 종식된 지금은, 뒤 늦게 우리 대한민국을 접경하여 아주 좁은 범주로 그 막대기 묶음의 권역이 줄어들었지만, 파급력 만큼은 가히 전 세계를 향한 위협을 구가하고 있음을 우리 세대가 목격한다.

특히 그 여파로 우리 삶 깊숙이에 그 막대기 묶음이 맹위를 떨치고 있건만 안타깝게도 우리 곁엔 아직 처칠이 없어 보인다.

에필로그.

윈스턴 처칠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그 파스케스(막대기 묶음)에 대항하여 ‘민주주의’ 가치를 반복해 되뇌이지만,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파스케스에게 점유당한 오늘날에는 윈스턴 처칠이 끊임 없이 가치로 되뇌었던 그  민주주의가 실상은 ‘자유민주주의’(Δημοκρατία)였다는 사실로 역류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증했던 그 혼합의 왜곡이 우리사회에서 폭정, 과두정, 중우정으로 고스란히 시연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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