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밑의 욕망

1850년 뉴잉글랜드 어느 마을, 거대한 느릅나무 그늘에 가려 항상 음습한 생활을 이어가는 한 농가가 있었다. 캐벗(Cabot)이라는 노인의 가정이다. 이 집에는 엄청난 거구에 탐욕스럽고 색(色)을 밝히는 노인 캐벗과 그의 첫째 아들 에번(Even), 둘째 시미언(Simeon), 셋째 피터(Peter)가 살고 있다. 시미언과 피터는 금광에서 노다지를 찾겠다며 캘리포니아로 갈 꿈에 부풀어 있고, 에번은 아버지의 재산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그런 와중에 이미 나이가 일흔 다섯이나 된 아버지 캐벗은 젊고 싱싱한 여자 에비(Abbey)를 집에 데려다 놓았다. 아내로 데려온 것이다. 가난에 찌들어 방황하는 삶을 살던 에비는 안락한 생활에 정착하고자 이 고령의 노인 품에 들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요조숙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장남 에번을 보자마자 추파를 보내기 시작한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에번은 시미언과 피터에게 각각 3백 달러씩을 주고 아버지 유산을 포기하라 한다. 3백 달러씩 손에 쥔 두 사람은 집을 떠난다. 그러는 동안 에비는 싱싱한 육체를 이용해 노인의 마음을 손아귀에 넣고 자기에게 모든 재산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그러면서도 에번을 유혹해 통간한다. 열 달 뒤에 에비는 에번의 아이까지 낳는다. 아버지 캐벗이 진실을 모른 채 자기 뒤를 이을 자식이 태어났다며 좋아하고 있는 동안, 계모 에비와 아들 에번은 불륜을 지속한다. 부자 간에 벌이는 이 같은 탐욕과 색욕의 뒤섞임이 짐승 같은 시간을 흘려보낸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에번은 에비가 자신을 이용해 낳은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 하려 든다는 생각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애증의 시간이 뒤엉키는 가운데 에비는 자신이 에번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겠다며 자기가 낳은 갓난아기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 불륜의 씨앗만 없애면 에번이 변심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안 아버지 캐벗은 보안관이 에비와 에번을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외친다.

“살인자들끼리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너희 같은 년놈은 한 나뭇가지에 매달아, 나처럼 늙은 사람 구경거리나 되게 해야해!”

이 막장 드라마는 결코 외설이 아니다. 1936년 노벨문학상과 네 번의 플리처상을 받은 현대 희곡의 거장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이라는 작품의 줄거리이다. (※ 찰리 채플린이 이 사람의 사위)

Desire Under the Elms (1958)

그리스 신화 메데이아(Μήδεια)를 본뜬 듯한 이 이야기의 제목에는 왜 ‘느릅나무’가 들어 있을까. 느릅나무의 학명은 Ulmus davidiana var. japonica이다. 이름에는 별 기호가 없다. 다만 아래 보다시피 날씨는 화창한데 무성한 잎 아래로는 언제나 음습하다.

아들과 젊은 새어머니, 하늘과 닿은 윗부분은 화사하지만 아래로는 음습한 이 두 젊은 주인공의 욕망은 이 극에 등장하는 두 그루의 느릅나무를 닮았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 신화적일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지닌 아버지 캐벗은 착취의 전형이다. 새 여자를 데려오기 전에 그는 두 번의 상처(喪妻)를 당하였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내들은 캐벗에게 지나치게 혹사당한 나머지 죽어나간 것이었다. 두 그루의 느릅나무가 또한 이 두 아내들을 상징한다.

Musical Image.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서는 ‘느릅나무 밑에서 기다리라’는 말은 ‘믿지 말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J. K. Rowling의 《해리포터》에 나오는 말포이의 마술 지팡이 재료가 또한 느릅나무이기도 하다. 욕심과 심술로 얼룩진 마술 지팡이.

느릅나무의 주인은 그런 욕망의 주인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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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저 희곡에 나오는 에번의 대사 한 대목을 소개한다.

(풀이 죽어 나지막하게) 알았어, 이제야 알았어. 날 농락했어. 바보 취급을 한 거야! 처음부터 도둑질을 할 생각이었지. 나를 끌어들여 아들을 낳아서는 아버지의 아들로 꾸미고, 이 농장을 차지하고. (괴롭고 저주스러운 눈길로 에비를 응시한다.) 당신 몸엔 악마가 깃들어 있어! 인간이면 그 따위 악한 짓을 할 순 없어. (아픈 마음으로) 차라리 당신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분노하며) 나도 복수를 하겠어. (사납게) 그 늙은이한테 복수하고야 말거야, 당신한테도. 떠들썩하게 자랑하는 아들이 누구라는 이야기를 해줄테야. 그리고 당신하고 늙은이가 서로 잡아먹도록 할거야. (결심한듯) 난 가!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와서 당신들 두 인간을 길거리로 차내 버려야지. 당신은 아들하고 같이 굶어죽게 만들테야! (괴로워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 당장 죽여버리는 게 좋아. 다시는 보지 않겠어. 그것 때문에, 그게 생겼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만 거야. 계획적으로 도둑질을 하게 된 거지. 난 당신을 믿었어, 벙어리 황소처럼. 그래, 그런데 당신은 날 속였어.

‘느릅나무’ 밑의 욕망”의 1개의 댓글

  1. 양성봉 댓글달기

    욕망이든 욕정이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시간, 공간, 힘에 의해 제어될 뿐. 저런 형태의 크고 작은 일이 지금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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