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밑의 욕망

1850년 뉴잉글랜드 어느 마을, 거대한 느릅나무 그늘에 가려 항상 음습한 생활을 이어가는 한 농가가 있었다. 캐벗(Cabot)이라는 노인의 가정이다. 이 집에는 엄청난 거구에 탐욕스럽고 색(色)을 밝히는 노인 캐벗과 그의 첫째 아들 에번(Even), 둘째 시미언(Simeon), 셋째 피터(Peter)가 살고 있다. 시미언과 피터는 금광에서 노다지를 찾겠다며 캘리포니아로 갈 꿈에 부풀어 있고, 에번은 아버지의 재산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그런 와중에 이미 나이가 일흔 다섯이나 된 아버지 캐벗은 젊고 싱싱한 여자 에비(Abbey)를 집에 데려다 놓았다. 아내로 데려온 것이다. 가난에 찌들어 방황하는 삶을 살던 에비는 안락한 생활에 정착하고자 이 고령의 노인 품에 들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요조숙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장남 에번을 보자마자 추파를 보내기 시작한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에번은 시미언과 피터에게 각각 3백 달러씩을 주고 아버지 유산을 포기하라 한다. 3백 달러씩 손에 쥔 두 사람은 집을 떠난다. 그러는 동안 에비는 싱싱한 육체를 이용해 노인의 마음을 손아귀에 넣고 자기에게 모든 재산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그러면서도 에번을 유혹해 통간한다. 열 달 뒤에 에비는 에번의 아이까지 낳는다. 아버지 캐벗이 진실을 모른 채 자기 뒤를 이을 자식이 태어났다며 좋아하고 있는 동안, 계모 에비와 아들 에번은 불륜을 지속한다. 부자 간에 벌이는 이 같은 탐욕과 색욕의 뒤섞임이 짐승 같은 시간을 흘려보낸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에번은 에비가 자신을 이용해 낳은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 하려 든다는 생각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애증의 시간이 뒤엉키는 가운데 에비는 자신이 에번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겠다며 자기가 낳은 갓난아기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 불륜의 씨앗만 없애면 에번이 변심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안 아버지 캐벗은 보안관이 에비와 에번을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외친다.

“살인자들끼리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너희 같은 년놈은 한 나뭇가지에 매달아, 나처럼 늙은 사람 구경거리나 되게 해야해!”

이 막장 드라마는 결코 외설이 아니다. 1936년 노벨문학상과 네 번의 플리처상을 받은 현대 희곡의 거장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이라는 작품의 줄거리이다. (※ 찰리 채플린이 이 사람의 사위)

Desire Under the Elms (1958)

그리스 신화 메데이아(Μήδεια)를 본뜬 듯한 이 이야기의 제목에는 왜 ‘느릅나무’가 들어 있을까. 느릅나무의 학명은 Ulmus davidiana var. japonica이다. 이름에는 별 기호가 없다. 다만 아래 보다시피 날씨는 화창한데 무성한 잎 아래로는 언제나 음습하다.

아들과 젊은 새어머니, 하늘과 닿은 윗부분은 화사하지만 아래로는 음습한 이 두 젊은 주인공의 욕망은 이 극에 등장하는 두 그루의 느릅나무를 닮았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 신화적일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지닌 아버지 캐벗은 착취의 전형이다. 새 여자를 데려오기 전에 그는 두 번의 상처(喪妻)를 당하였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내들은 캐벗에게 지나치게 혹사당한 나머지 죽어나간 것이었다. 두 그루의 느릅나무가 또한 이 두 아내들을 상징한다.

Musical Image.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서는 ‘느릅나무 밑에서 기다리라’는 말은 ‘믿지 말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J. K. Rowling의 《해리포터》에 나오는 말포이의 마술 지팡이 재료가 또한 느릅나무이기도 하다. 욕심과 심술로 얼룩진 마술 지팡이.

느릅나무의 주인은 그런 욕망의 주인공일 것이다.

Liberalism Facebook

끝으로 저 희곡에 나오는 에번의 대사 한 대목을 소개한다.

(풀이 죽어 나지막하게) 알았어, 이제야 알았어. 날 농락했어. 바보 취급을 한 거야! 처음부터 도둑질을 할 생각이었지. 나를 끌어들여 아들을 낳아서는 아버지의 아들로 꾸미고, 이 농장을 차지하고. (괴롭고 저주스러운 눈길로 에비를 응시한다.) 당신 몸엔 악마가 깃들어 있어! 인간이면 그 따위 악한 짓을 할 순 없어. (아픈 마음으로) 차라리 당신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분노하며) 나도 복수를 하겠어. (사납게) 그 늙은이한테 복수하고야 말거야, 당신한테도. 떠들썩하게 자랑하는 아들이 누구라는 이야기를 해줄테야. 그리고 당신하고 늙은이가 서로 잡아먹도록 할거야. (결심한듯) 난 가!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와서 당신들 두 인간을 길거리로 차내 버려야지. 당신은 아들하고 같이 굶어죽게 만들테야! (괴로워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 당장 죽여버리는 게 좋아. 다시는 보지 않겠어. 그것 때문에, 그게 생겼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만 거야. 계획적으로 도둑질을 하게 된 거지. 난 당신을 믿었어, 벙어리 황소처럼. 그래, 그런데 당신은 날 속였어.

트럼프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 선포문 번역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월 6일(현지시각)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다음은 발표문의 요약 번역한 것이다.

In U.S. presidential first, Trump prays at Jerusalem’s Western Wall

“내가 집무실에 왔을 때(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나는 열린 눈으로, 그리고 매우 새로운 생각으로 세상에 대한 도전을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실패한 전략을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도전 과제에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가 발표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1995년 의회는 예루살렘 대사관 법을 채택하여 연방정부가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그 도시가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촉구한 바 있습니다. 이 법안은 압도적이면서도 초당적인 다수에 의해 의회를 통과했으며, 불과 6개월 전에 상원의 만장일치로 재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20년이 넘은 세월 동안 모든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인정하거나,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지도 않았고, 그 법에 대한 유보권을 행사했습니다.

앞선 대통령들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승인하는 그 법안을 연기하는 것이 평화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자기들의 믿음에 따라 그 유보권을 행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용기가 부족하다 말하지만, 당시엔 그들의 그러한 인식에 따른 근거를 토대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봅니다.

그럼에도 기록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20년이라는 기간이 넘도록 그 법안을 지연시킨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지속적인 평화 협정에 결코 근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게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하고도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할 때라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전 대통령이 이를 주요한 의제로 삼았으나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것을 이행하고자 합니다.

나는 미국의 최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방침을 판단하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를 촉구하고자 합니다. 이는 평화를 진전시키고 지속적인 합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오랜 염원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다른 주권 국가와 같이 자신들의 자산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주권 국가입니다. 이를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입니다.

70년 전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 재임 시절,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수도를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이 고대에 설립 한 수도말입니다.

오늘 날, 예루살렘은 현대 이스라엘 정부의 거점입니다. 이스라엘 대법원뿐 아니라 이스라엘 의회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총리와 대통령의 초기 거주지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정부 부처의 본부가 위치한 곳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 그리고 군부대를 방문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과의 만남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3대 종교의 심장부 일뿐 아니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의 심장부이기도 합니다. 지난 70년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 무슬림, 기독교인, 그리고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의 양심에 따라,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 경외할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오늘날 유대인들이 서쪽 벽에서 기도하는 곳으로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서쪽 벽에는 기독교인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무슬림은 알-아크 사원에서 예배합니다.

그러나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들은 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식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곳을 이스라엘의 자산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명백히 선언합니다.

이는 현실을 인정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옳은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대사관 법에 따라 미 국무부가 텔 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미국 대사관을 옮길 준비를 시작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건축 설계사와 기술자들을 고용하는 즉시 건축은 시작될 것이며, 이어서 새로운 대사관이 완공되고 나면 그 평화에 대한 찬사가 될 것입니다.

지금 이 발표를 하면서 나는 또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이 결정은 지속적인 평화 협정을 촉구하려는 우리의 강한 의지에서 벗어나는 고려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과 관련한 활발한 합의가 진행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의 이스라엘 주권과 관련하여 분쟁중인 국경 문제에 관한 해결을 포함하여 어떠한 최종 지위로서의 입장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어디까지나 관련 당사자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중략…..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상호 이해와 존경의 길로 스스로 재 헌신 합시다. 우리가 우리의 오랜 기대를 다시 생각해보고 마음과 마음을 서로 가능성 있게 활짝 엽시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독교인, 회교도 지역의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고귀한 노력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이 미국에 있기를.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괴테)

괴테가 “태초에 빛이 있었다” 하지 않고 “태초에 행위(리듬)가 있었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태초에 빛이 있었다”란 기독교 성서 가운데 구약 부분의 가장 첫 책에서 천지창조를 상징하는 명제인데,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개정된 기치로 언어(λόγος)에 천착함으로써 응답했다. 괴테는 이를 한층 실존적으로 격상시켜 ‘죄’라는 인간의 불가항력적 본성을 입혀 응답한 것이다.

그 태초에 행위가 창조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가정할 수 있다.

 

§
 

1. “감각에 속해 있지 않았던 ‘지각인 것’은 없다.”

2. 우리 인식은 하나의 먼 기억에 의존한다.

 

3. 겪었던 어떤 느낌을 회상 시키는 순간에야 무엇인가 의미케 된다.

 

 

4. 아는 것만 본다.

 

 

5. 어떤 사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때 그것의 존재를 받아 들이지 못한다.

 

 

6. 하나의 메시지를 해독하는 것은 곧 상징적 한 형태를 지각하는 것이다.

 

 

 

7. 그러므로 장차 감정으로 인식될 먼저 존재했던 그것들(놀람이나 두려움이나 믿음이나 사랑 그런것들)과 환경(맹수나 가난이나 그런 것들) 사이에서 인간은 몸짓으로 존재했던 것뿐이다.

 

 

8. 언어는 거기에 입혀진 것이다.

 

 

 

9. 그런 점에서 인간은 들숨과 날숨의 반복 속에서 떨어져 나온 외침으로서 한 존재인 것이지 자기네끼리 스스로 만들어낸 생명이 아니다.

 

 

10. 이것이 기독교인에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인 것이다.

 

 

§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 이렇게 써야 하지 않을까.
벌써 여기에서부터 막히다니!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
‘말씀’이라는 낱말을 과연 이렇듯 높이 평가해야 하는가.
정령의 깨우침을 받았다면,
이 낱말을 다르게 옮겨야 한다.
“태초에 ‘뜻’이 있었느니라!” 이렇게 써야 하지 않을까.
네 펜이 경솔하게 서두르지 않도록
첫 행을 심사숙고하라!
과연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것이 뜻일까?
“태초에 ‘힘’이 있었느니라!” 이렇게 쓰여 있어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이것을 쓰는 동안에 벌써 뭔가가 미진하다고 경고하는구나.
정령이 도와주는구나! 불편듯 좋은 생각이 떠올라
자신 있게 쓰노라.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Im Anfang war die Tat!”)
― 괴테의 「파우스트」 중에서

‘남한산성’과 문장(文章)으로 이룬 나라

 
 

영화 ‘남한산성’(2017)은 소국이 겪어야만 하는 대국(大國)과 맺는 화친(和親)의 정당성을 아주 잘 묘사해 낸 영화이지만 원작 「남한산성」의 본질은 잘 옮겨 내지 못한 영화다.

1. 문장의 발신(發身)

원작은 화친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화친을 둘러싸고 오고가는 문장(文章)의 흥망성쇠를 묘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즉 ‘남한산성’의 핵심 주제는 ‘문장’이다.

원작 초입에는 이런 표현이 담겨 있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두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문장으로 발신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종교적 개념을 빌리면 그것은 일종의 육화(肉化, Incarnation)를 이르는 말이다. 발신이란 ‘천한 처지에서 벗어나 앞길이 환하게 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들이 환하게 존재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임금들은 문장가들을 곁에 두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도 비교적 ‘문장’이라는 핵심어가 자주 들리지만, 원작과 지향점을 달리하기에 그 본질을 살리지 못했다.

이를 테면 영의정이자 제찰사인 김류가 전투 중에 “(오늘이) 무당에게 점지 받은 날이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대목이나, 말죽을 먹는 향군(鄕軍)들이 영의정인 자신을 비웃자 “입을 찢으라” 직접 명령을 내리는 장면들은 다 원작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인조반정 당시 능양군[인조] 옹립의 주역을 채신없는 간신배로 각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게다가 얼어붙은 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길 안내해 준 사공의 목을 칼로 벤 김상헌이 우는 장면을 누락시킨 것은 작은 편집에 지나지 않지만 실은 큰 흐름을 끊은 것이다. 김상헌의 문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맥락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종말을 원작뿐 아니라 실제 역사와도 다르게 자결로써 생을 마감시킨 것 역시 다 문장을 끊어놓는 이 영화의 편집이며, 자결하기 전에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도 과잉된 각색이다.

2. 발신한 문장들

이러한 과잉 편집행위들은 아마도 현대적 화친의 정당성 곧,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 라는 현대적 감각의 주화론을 지나치게 투사시키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장의 도단일 것이다. 사실 원작의 문장들은 주화(主和)이건 척화(斥和)이건 간에 공평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몇 자를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영의정 김류가 “적이 다시 대동강을 건넌다면 도원수와 평양과 황해의 감사, 병마사 들의 목을 베고 그 처자식들도 군율로 연화함이 옳을 줄 아옵니다”라고 간하는 말에 대한 인조의 문장은 이러했다.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그러하되 적병이 이미 도성을 에워싸서 왕명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서북 산성에 군율이 닿겠느냐.”

“경은 늘 내 가까이 있으니 군율이 쉽게 닿겠구나.”

임금으로 하여금 언 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바로 어제 안내했던 사공이 이제 내일은 청나라 군사를 건너게 도와주고는 곡식이라도 얻겠노라 하자, 그런 말을 듣는 김상헌의 내면에 흐르는 문장은 이렇게 소개된다.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아침에 대청마루에서 남쪽 선영을 울던 울음보다도 더 깊은 울름이 김상헌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김상헌은 뜨거운 미숫가루를 넘겨서 울음을 눌렀다.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김상헌은 허리에 찬 환도(環刀, 군복에 갖추는 칼) 쪽으로 가려는 팔을 달래고 말렸다.”

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말들이 굶어죽기 시작하자, 동상에 걸린 병사를 위해 나눠주었던 가마니들을 다시 거두어서 말먹이로 쓰자는 문장과 그래선 안 된다는 문장 간의 교전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전하, 지금 말들이 굶어죽고 있으나 이제라도 먹이면 오십 마리 정도는 부릴 수 있습니다. 말은 군사의 핵심입니다. 말이 없으면 어찌 군왕의 위엄을 세울 수 있으며, 먼저 치는 싸움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 가마니를 거두소서. 가마니를 풀어서 죽을 쑤어 말을 먹여야 할 것입니다.”
(이성구가 말했다)
“말은 많이 먹는 짐승인지라 가마니를 썰어 먹여도 결국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군병의 추위가 더 절박한 일이오니…”
(김류가 이성구의 말을 가로챘다)
“병판은 어찌 그리 아둔하오. 군병은 사람이고 말은 짐승이니, 사람은 그 뜻의 힘으로 견딜 것이고 짐승은 견디지 못하는 것이오. 병판은 마병 없이 싸우자는 게요?”
(임금은 화로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군병의 언 몸을 덮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류가 말했다)
“전하, 신인들 어찌 가마니가 아니라 숯불 화로 한 개씩을 총안마다 나누어주고 싶지 않겠사옵니까. 성첩에 가마니를 나누어준들 곧 젖고 못 쓰게 될 것입니다. 속히 거두어 말을 먹이게 하소서.”

다음은 주화파 최명길이 화친을 독려하며 왕께 올리는 문장이다.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 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계속해서, 화친 쪽으로 가닥이 굳은 후 최명길이 인조를 대신하여 칸에게 답서로 써 올리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고로 화친의 문장을 작성한 자는 역적의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기에, 다들 거짓으로 글을 써 내던 중에 최명길의 글이 간택된 것.)

“소방(조선)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시문과 담론에 스스로 눈이 멀어 천명이 순환에 닿지 못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명을 아비로 섬겨 왔는데, 그 섬김의 지극함은 황제께서 망월봉에 오르시어 친히 보신 바와 같습니다.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소방의 군신들이 들불처럼 휘몰아오는 황군의 위무를 차마 영접하지 못하고 우선 몸을 피해 산성으로 들어왔으나 어찌 감히 대국에 맞서려는 뜻이 있겠나이까. 쫓기는 작은 짐승이 굴속으로 스며든 일을 황제께서 기어이 군사를 움직여 꾸짖으신다면, 소방은 황제의 은덕에 닿지 못하여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옵니다.
또 성벽에서 딹싸움하듯 소소한 다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한 줄기 허술한 돌담을 지켜보려는 미망이었을 뿐 어찌 황제의 군사에 대적할 뜻이 있었겠나이까.
황제께서 친히 여러 강을 건너시어 이 궁벽한 산골로 내려오시니, 오셔서 소방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복되고 또 기뻐서 달려 나가 배알하려 하나 황제의 크신 노여움과 깊으신 근심이 또한 두려워서 소방은 차마 나아가지 못하고 돌담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옵니다.
이제 스스로 새로워지고 기뻐서 따르려는 소방의 뜻이 돌담 안에서 시들지 않도록 살펴주시옵고, 모든 생령들의 살고자 하는 기운을 거두어서 기르시는 황제의 천하에 소방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3. 문장에 대한 판결(심판)

다음은 칸의 문장이다. 칸은 그 출신이 미개한 문명에서 비롯되었지만 원저 김훈의 문장 속에서 칸이 가진 문장은 마치 문장의 신(神)인 것만 같이 임한다.

“칸의 문장은 거침없고 꾸밈이 없었으며, 창으로 범을 찌르듯 달려들었다. 그 문장은 번뜩이는 눈매에서 나온 듯했다.”

칸는 인조에게 보내는 조서를 작성한 문한관을 불러 ‘고사를 끌어 대거나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들을 다 뭉개고 꾸짖으며’ 이런 문장을 주문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그런가 하면 조선 왕이 보내온 문서를 군장들 앞으로 내던지며 이렇게 판결한다.

“조선의 말이 사특하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이냐? 말하라. 너희들은 알겠느냐?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뭐라고 해대는 말이냐?”

(노비 출신의 조선인 통역관 정명수가 이렇게 부연했다.)
“저들이 삶을 구걸하면서도,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으니…”
(칸이 되 받았다.)
“거기까지는 나도 알겠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냐?”
“폐하께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주십사는 뜻으로 아옵니다.”
(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노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그 말이냐? 그 말이 이리도 요사스러우냐?”
“저들의 말이 본래 그러한지라…”

저들의 말이 본래 그러한지라… 이것은 참으로 이 ‘남한산성’이 말하려고 하는 ‘문장’의 진정한 표제가 아닐 수 없다.?조선인의 말과 문장은 주화인 동시에 척화요, 칼인 동시에 방패요, 재능인 동시에 장애/결함인 까닭이다.

칸의 첫 조서에서는 사실 이 사특한 문장과 말을 이렇게 칭송한 바 있다.

“…너의 아들(세자)이 준수하고 총명하며, 대신들의 문장이 곱고 범절이 반듯해서 옥같이 맑다 하니 가까이 두려 한다. 내 어여삐 쓰다듬고 가르쳐서 너희의 충심이 무르익어 아름다운 날에 마땅히 좋은 옷을 입혀서 돌려보내겠다…”

영화상에서 칼로 자결한 김상헌은 실제로는 목을 매달아 죽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가족에게 발견되어 살게 되었다고 사가는 전한다(그 자결의 진위를 의심스러워 하면서). 그렇게 살아남은 김상헌이 원작에서 송파강을 건너며 이런 문장에 잠긴다.

“길들은 아득해서 조령관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물 위에 어른거리는 길들을 바라보면서 성 안에서 목을 매달았을 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은 날들이 아까웠다.”

죽지 않기를 잘했다는 그의 문장은, “살아서 죽어 있느니, 죽어서 살아 있느니만 못하다” 했던 그의 평소 문장답지 않은 상념이었으나 그것은 그 개인의 간사함이라기보다는 삶 자체가 지닌 간사함에서 배어나오는 관성이 아니겠는가. 주화파 최명길의 문장이 우리 모두의 문장이듯 척화파 김상헌의 문장 역시 우리 모두가 구사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4. 문장의 미래

이렇게 발신한(incarnated) 문장들의 결과와 미래는 소설과 영화 이상으로 참담했다.

– 우선 대군/세자와 궁빈들 외에도 약 50만을 청이 끌고갔다.
– 그리고 명나라와 단교할 것.
– 청이 명을 정벌할 시 보병, 기병, 수군을 보낼 것.
– 군중 포로로 잡아간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 도망해 되돌아올 시에는 체포해 돌려보낼 것.
– 무너진 성벽의 신축, 수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 황금 1백냥, 백은 1천냥, 수우각궁면 2백 부, 표피 1백장….(너무 많아 생략)

저렇게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는 방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속전(ransom)이었다. 처음에는 1인당 10냥 정도 하던 것이 가격이 계속 뛰었다. 양반의 경우는 값을 더 올려주고라도 속히 데려오려 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 함께 갇혔던 이성구의 경우는 무려 1500금을 주고서 아들을 데려왔다. 그리하여 일반인에게는 속전의 방도마저 요원하여졌다.

또 하나의 문제는 돌아온 여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남성들이 전쟁에 져서 포로로 보냈던 여성들이 돌아왔을 때, 다시 결합해 살 것인가? 내칠 것인가? 이미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몸. 사대부 양반 가운데 재결합 하는 경우는 없었다 전한다. 이것이 환향녀/환향년의 유래가 되었다. (당대에 이 속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기록은 없다.)

5. 말먼지

김훈의 원작에는 말(言)먼지라는 챕터가 있다. 말 그대로 용천하는 발신 문장들에 대한 개탄일 것이다. 상기에 발췌한 문장들 외에도 수많은 주옥 같은 문장들이 말먼지와 같이 원작과 영화에 잠겨 있다.

그리고 이것을 영화로 관람한 정치인들의 주옥 같은 문장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 리뷰도 그 말먼지 중 하나일 것이지만서도.

 

에필로그

원작으로 접했던 남한산성을 영화로 다시 보면서 느꼈던 나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다.

“어찌하여 우리 정부는 중국에 저 막대한 피해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청구하지 않는 것일까? 일본에 청구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왜일까?”

 

영화 ‘덩케르크’는 ‘브렉시트’(Brexit) 이야기

1. ‘덩케르크’의 배경

<덩케르크>는 여러 보도에서 알려진 대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덩케르크 전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 34만여 명이 고립되자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전개된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을 극화한 영화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서부전선이 무너지고 연합군은 참패를 거듭하던 것이 전쟁 초기의 상황이었다. ‘덩케르크’ 지역에서 독일군의 집중적인 공략으로 전멸할 위기에 빠진 연합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결국 독일군에게 포위된다.

이 영화의 시작 부분인 해안의 풍경, 수십만의 병력임에도 하나 같이 무기력한 모습은 연속되는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채 갇혀 있던 당시 연합군의 상황을 잘 반영한다.

2. ‘덩케르크’의 구조

이 영화는 총 세 개의 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 The Mole/ one week (방파제/ 한 주)
– The Sea/ one day (바다/ 하루)
– The Air/ one hour (공중/ 한 시간)

이 세 개의 고리는 3개의 이야기인가? 3개의 시점인가?

§

방파제의 ‘한 주’ (The Mole/ one week)

덩케르크 현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소년 병사 토미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사실은 이야기라 느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플롯보다는 쇼트들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많은 관객이 “다큐멘터리다.” “지루하다.”고 느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이야기’이다.

토미가 구조선에 먼저 타기 위해 깁슨과 부상병을 들 것에 싣고 뛰는 이야기, 프랑스군보다는 영국군을 우선해서 승선시키는 이야기, 배 밑창에 숨어들어 밀물이 들어와 배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이야기, 총탄이 날아들어 여기저기 배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들어와 가라앉는 것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 등은 다 의미 있는 플롯들이다.

바다의 하루 (The Sea/ one day)

덩케르크에 고립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이 작전에는 영국의 수많은 개인 소유의 민간인 배가 징발된다. 섣불리 병력을 보냈다가 재차 고스란히 포위망에 갇히는 사태를 우려해서다.

‘바다의 하루’(The Sea/ one day)는 징발된 문스톤호(Moonstone) 선주의 아들 피터의 시점이다. 당초 영국군은 배만 징발해가려 했던 것인데, 문스톤호의 선주는 자신이 직접 배를 몰고 덩케르크로 향한다. 이때 피터의 친구 조지가 따라나선다.

앞서 ‘방파제’(The Mole/ a week)에서 시점을 제공한 토미와 동년배인 피터의 시점이란 실은 ‘조국’(homeland)의 관점일 것이다. 철저한 구조자로서의 입장. 정부나 군지휘부 입장과는 또 다른 의미의 구조자로서의 입장. 이를 테면 해군 제독이 망원경으로 바다를 보며 탄성을 내자 부관이 “뭐가 보이시냐”고 묻는다. 이때 제독은 “home(land)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것은 ‘조국이 보인다’는 표현으로서 문스톤호와 같은 수많은 민간 구조선이 구조를 자청하고 덩케르크 해안에 들어서자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문스톤호는 적기의 공격까지 피할 정도로 항해에 노련하지만 구조에도 철저하다. 목적지 덩케르크로 향하는 과정에서 바다에서 표류하는 장교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모두 구조하고, 덩케르크 현장에서도 배의 재원 이상의 많은 병사를 태운다.

특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장교(킬리언 머피)의 난동으로 친구 조지가 결국 죽었는데도 피터는, 나중에 제정신이 든 장교가 조지의 안부를 물을 때 “괜찮다.”며 책임을 묻지 않는다. PTSD 환자가 새로운 자책에 빠질까봐. 이 자세와 태도는 이 영화가 주장하는 ‘조국’으로서의 자질인 것일까.

하늘의 한 시간 (The Air/ one hour)

모래밭에서의 일주일은 바다에서는 하루 같고, 그리고 하늘에서는 한 시간과 같다.

이는 필경 만물의 이치 같은데, 전쟁에서의 이치이기도 하다. 시간이 남아돈다는 뜻이 아니다. 모래밭에서의 불안은 지루하고, 바다에서의 불안은 초조하지만, 하늘에서의 불안은 긴박하기만 하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모든 것이 내려다보이는 반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하늘의 한 시간 동안에 벌어지는 ‘일주일’을 압도하는 분량의 긴박감을 미처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모래밭’과 ‘하늘’의 괴리감은, 영화 말미에 문스톤호와 같이 귀환한 전투기 조종사 콜린스에게 육군 하나가 툭 내뱉는 말, “대체 공군은 한 게 뭐있냐?!” 라는 말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오로지 전투기 3대만이 투입되어 싸우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적으로 이 다이나모 작전에 투입된 영국 공군 전투기는 실제로 격추된 것만 474대였다고 한다. 독일군이 전투기 132대의 손실을 본 것에 비하면 3배에 육박하는 규모이다. 그럼에도 모래밭에 있던 사람의 입에서 “대체 공군은 한 게 뭐냐?!”는 말이 나온 것은 짙은 안개로 그들의 활약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기호화 된 장치로서 나타나는 시간의 유리(遊離) 현상이지만, 우리의 실존 세계에서도 ‘땅’과 ‘하늘’의 유리됨은 얼마든지 체감 가능한 현상이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다시 말하면, 신분이 낮거나, 돈이 없거나, 신의 응답이 더디거나.

바다에서 모든 장면을 목격한 문스톤호 선장 도슨만이 “우리가 안다”고 공중의 사람을 위로한다. 정말로 바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이 공중에서의 시점은 이 영화에서 가장 절묘한 대목이다. (이 영화가 IMAX로 제작된 이유이기도 할 텐데,) 이 시점은 바로 관람을 하는 관객의 시점일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 영화는 전쟁영화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라는 홍보문구와 함께 국내에 소개된 <덩케르크>는 분명한 전쟁영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전쟁을 방불케 했던 ‘브렉시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익히 알다시피 브렉시트(BREXIT)란 영국을 뜻하는 BRitish와 탈출을 뜻하는 EXIT가 합쳐서 된 말로서 지브롤터 영국령을 포함하는 전 영국이 EU(유럽연합)에서 탈퇴할 당시 나온 조어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탈출’ 혹은 ‘(빠져) 나가다’ 일 것이다.

영국은 EU에서 정치, 경제면에서 독일과 더불어 주류였기 때문에 영국의 이탈은 EU의 존재의 의미의 퇴색이며 EU와의 결별이라기보다는 사실상의 독일과의 결별이었던 셈이다. <덩케르크> 이야기는 불과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에서의 적/악의 무리였던 독일과 불과 100년도 안 지나서 연합을 이루어 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연합체를 둘러싸고 여전히 전쟁 당시의 패러다임을 복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놀랍다.

상기와 같은 구조에 덧붙여 몇 가지 기호 역할을 하고 있는 쇼트들을 소개하면,

썰물이 다 빠져나가 땅에서 움직이지 않는 배 밑에 은신하여 밀물에 배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총탄에 구멍은 뚫리고, 그 구멍들을 일일이 손으로 틀어막아야 하는 상황, 그나마 그렇게 구멍 난 배라도 띄우려면 짐을 줄여야 하는데 사람을 줄이자는 상황, 어떤 사람을 줄여야 할까 했을 때 영국군으로 위장하고 들어온 프랑스인을 내리게 해야 한다는 주장… 그렇지만 프랑스도 연합군이 아니더냐…는 따위의 다이얼로그들은 다 브렉시트 전후의 영국 상황을 표지한다.

2016년 이 브렉시트를 놓고 영국은 분열에 빠졌는데, 6월경 EU에 잔류할 것을 주장하던 노동당 하원의원이 도서관 앞에서 한 남성에게 흉기에 찔리고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테러범은 하원의원을 공격하며 “Britain first!”(영국이 먼저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일종의 캐치프레이즈였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프랑스 병사들이 철수선에 태워달라고 간청할 때 “Britain first!”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영국 군함들이 속수무책으로 침몰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본래 영국은 막강한 해군의 나라가 아니던가. 그런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한 영국이 처한 현실을 변증하는 맥락에서 보면 큰 무리가 없는 복선이기도 하다.

또한 침몰한 배들에서 흘러나와 바닷물에 엉긴 기름으로 인해 구조된 영국 백인 병사들의 얼굴이 온통 검은 칠이 된 장면도 오래 노출된다. 이는 영국(또는 유럽)에 포화 된 유색 인종을 표명할 것이다. 브렉시트의 주된 요인은 외국인 이주민 정책 분야에 관한 의제였던 까닭이다. 다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이런 쇼트를 통해 영국 백인도 유색인종과 같은 처지가 될 수도 있다는 풍자를 한 것인지 아니면 브렉시트에 승선한 영국 자국인 중에는 유색인종도 있다는 일종의 변증인지, 그 노선은 알 수 없다. 참고로 런던 태생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직 영국 국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영화 <덩케르트>는 이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서 브렉시트를 변증한다. 특별히 영화 종장에 흘러나오는 윈스턴 처칠의 위대한 연설을 그 변증에 종사시키고 있다.

“영국은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철수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이 연설을 방증이라도 하듯 영화 속에서 자주 들려오는 “영국 먼저!” 라는 구호는 단순한 이기심에서만이 아니라, 다이얼로그들의 전반적인 의식적 행간 속에서 “그 다음은 프랑스”라는 의미와 맞물려 들려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철수 작전의 지휘관 볼튼이 프랑스의 철수를 돕기 위해 영국군 철수 후에도 방파제에 남는 장면으로 장식되었는데, 실제 역사적으로는 프랑스 병력 2개 사단이 영국군의 철수를 엄호하다가 남겨져 작전 종료일에 모두 독일군 포로가 된다.

앞에서 제1시점인 ‘방파제’를 ‘모래’라는 용어로 대체해서 서술하였는데, ‘덩케르트’ 자체 즉, The Mole/ one week로서 공간은 종교적 기호를 갖는다. 됭케르크(Dunkirk)는 ‘모래밭의 교회’(‘dune’ㆍ‘kerke’)라는 뜻에서 온 말로서 모래/ 해안선은 전통적으로 종말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말이란 임박해 있는 전쟁이기도 하다. 이 혼재의 공간은 그래서 The Mole이라 이름지었을 수도 있다. Mole은 방파제도 되지만 스파이도 되기 때문이다. 앞서 총탄에 구멍이 뚫려 가라앉는 배 밑 상황에서 서로 정체와 신분을 따지고 묻는 장면들에 대해 일러 두었다. 종말이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시간과 공간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바다는 화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ㅡ계 12:12, 17.

4. 코렉시트(Korexit)

이 영화가 “<인천상륙작전>, <연평해전>, <국제시장> 같은 값싼 애국심 영화와는 격이 다르다”느니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다”라느니, 국내 전문가의 평들은 앞서 수입/배급사에서 내 건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라는 선전만큼이나 넌센스하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인천상륙작전’이나 ‘국제시장’(흥남철수) 만큼이나, 영국인에게 각인된 이 민간선박들의 활약과 기적으로 회자되는 ‘덩케르트의 기적’(Dunkirt Spirit)은, 실제 역사적으로는 대부분의 덩케르크에 갇혔던 병사들이 민간선박이 아닌 군함에 태워져서 구조되었다는 점에서 소위 우리네 값싼 애국심(평가단은 이를 대개 ‘국뽕’이라고 부른다)을 능가한다. 어느 나라든 각인된 애국심은 있기 마련인데도, 유독 우리의 것만 값싸게 여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전쟁다운 전쟁을 교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철수’, ‘구조’, ‘탈출’ 등을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닌 강력한 전쟁수행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수를 승리라고 가르치는 처칠의 교지속에서 이 영화를 읽었을 때, 우리의 정부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당장에 ‘탈북민’, 그리고 미처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는 저 ‘북녘의 모래밭’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얼마전 북한 선전 매체에 등장한 탈북 방송인 임지현씨에 대한 납치설이 제기 되고 있는 가운데 [voa news], 중국 공안에 붙잡힌 탈북 일가족 5명이 음독 자살한 사건, 그리고 다른 70명이 북송된 사건은 전쟁의 현재진행이다)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 거점은 어떻게 작동될까?

– The Mole/ one week (방파제/ 한 주)
– The Sea/ one day (바다/ 하루)
– The Air/ one hour (공중/ 한 시간)

저 북녘은 The Mole 지역일까? 그러려면 문스톤호가 활약한 ‘바다’로서의 자의식이, 스핏파이어/파리어가 활약한 ‘하늘’로서의 자의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우리 내면에 문스톤과 스핏파이어는커녕, 우리 자의식과 정체성이 내면적 스파이(mole)가 혼재하는 모래밭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저 북녘이 아닌 이 남쪽 지대는 도리어 불과 1주일 시한을 남겨둔 The Mole 지대로 전락하고 마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의 바다와 공중은 누가 될꼬? 그야말로 코렉시트(Korexit*). [* ‘Korea’ + ‘Exit’]

참고로 1주일(The Mole/ one week)은 다이나모 작전 기간이었던 총 9일(5/27-6/4) 중에서 영국군이 철수를 완료한 실제 기간이었다.

에필로그.

이 영화에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는 캐릭터로 킬리언 머피가 등장한다. 문스톤호가 뒤집힌 배에서 표류하고 있던 이 사람을 구조해서 태웠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배우다)

그런데 이 인물이 ‘방파제’(The Mole/ one week)에서도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토미가 깁슨과 함께 기뢰를 맞은 배에서 탈출을 했을 때, 구명 보트에 자리가 없다며 태워주지 않은 그 보트의 지휘관으로 나왔던 것이다.

토미에게 더 이상은 태울 수 없으니 물에서 기다리라며, 물이 차갑지 않으니 괜찮을 것이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덧붙이지만 실상은 별로 구조의 의지가 없는 지휘관으로 나왔던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이미 One Day(the Sea) 구간에서 구조가 된 상태임에도, 극상에서는 One Week(the Mole) 지역에서 병사를 구조하지 않는 장교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1인 2역일까? 아니면 서로 다른 시/공간의 연결일까?

이 신비로운 인물의 기호가 바로 코렉시트(Korexit)의 표지이다.

The Mole(방파제) 지대에서 one week(일주일)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The Sea(바다) 권역에 들어와서도 자신의 본분과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한 구간씩 밀리는 것이다. One Week를 방어하지 못하면 One Day에서 여전히 One Week를 살아가는 원리라고나 할까? 이 영화에서 PTSD 장애가 그렇게 재해석되었다. 어느 면에서 우리들은 심각한 PTSD를 겪고 있는 셈이다.

6.25.전쟁은 다이나모 작전 이후 10년 뒤에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