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Carl Jung)과 나치즘(Nazism)

융(Carl Jung)은 어떻게 히틀러 나치즘(Nazism)에 부역했나.

구글 검색 창에 “칼 융과 나치즘”(Carl Jung and Nazism)이라는 말을 기입해 본 적 있는가. 융(Carl Jung)이 반유대주의 신봉자이자 나치의 동조자라는 혐의에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많은 자료가 그를 비난하고 있거나, 변증을 꾀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를 토양적 혈통적 아리안 인종의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문제를 식별하는 일은 의외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이 논쟁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한 때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친구이자, 학생, 또는 동료였던 이 유명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에 대한 증언은 무엇이 사실인가ㅡ

진실은 결코 좋게 보이지만은 않는다고 전한다. 자신의 여동생과 함께 나치의 길을 가고자 했지만 정작 나치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제 된 니체와는 달리, 융은 반유대주의자로 읽히는 맥락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 않다. 1934년 The State of Psychotherapy Today지(誌)에서 그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를 “가공할 현상”으로 경탄해 마지않으면서 “아리안 종족의 무의식은 유대인보다 잠재력이 더 크다.”고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사학자 앤드류 사무엘스(Andrew Samuels)가 보여 주듯 그러한 진술들 가운데 가장 불쾌한 것 중 하나였다.

친 융 학파 중 한 사람은 Lingering Shadows라 불리는 수필집에서 융이 “나치의 이념에 무의식적으로 감염되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심리학자 John Conger는 “반(反) 유대주의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감염되었다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옹호적 반문을 한다. 나치가 권력을 잡기 전에 융은 이미 30대 때에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마찬가지로 유대인 동료들을 쫓아 냄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한편 전문직 종사자들과 거래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전기작가 디어드리 베어(Deirdre Bair)는 사람들이 융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융의 이름으로 (유대인)박해를 지지하곤 했다고 주장한다. 융은 특히 자신이 “독일인의 심리 요법이 유대인 개개인에게 공개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실제로 투쟁했었다”는 가디언지의 마크 버넌(Mark Vernon)의 기사에 격분한 적이 있다. 베어는 융이 “지도층 의사들과 함께 ‘총통은 미쳤다’고 선언함으로써 히틀러를 축출하기 위한 두어 가지 계획에 참여했으나, 둘 다 무위로 그쳤다.”고 전한다. 하이데거(Heidegger)와는 달리 융은 전쟁 중에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강하게 비난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유대인 분석가들을 보호했다”고 Conger는 말한다. 난민을 도왔을 뿐 아니라 전쟁 중에 그는 CIA의 전신인 OSS에서 일했다고도 한다.

한편 알렌 덜레스(Allen Dulles)는 융의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한 깊은 반감에 관해서도 썼다. 덜레스는 “융 교수가 전쟁 중에 연합군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융의 언어들, 인격 속에서의 모순과 행동은 아무리 반쯤 접어 듣더라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융의 아돌프 히트러에 관한 관조를 위한 정당성에 종사한다. 무엇보다 융에게 찬사를 보내는 오늘날의 신 나치들을 들여다 보면, 그가 제시했던 히틀러의 특징 곧, “보탄(Wotan*) 또는 오딘(Odin)”으로서 당대 독일인들이 했던 것처럼 현대의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에다가 고대 유럽인들의 공포의 파간/선전 시스템을 그대로 옷입힘으로써 자기네 신자들을 흥분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 보탄: 북유럽 신화의 Odin에 해당하는 게르만 신화의 신]

1936년 에세이 Wotans에서 융은 “1933년 수십만의 실직자들이 벌인 행진”을 통해 독일인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끝을 향해” 이주한 것은 “정신력의 인격화”(personification of psychic forces)였다면서 그 모든 힘으로서의 전통 신으로 ‘보탄’(Wotans)을 묘사했다. 그러면서 융은 보탄이 “폭풍과 열광의 신, 정열의 자유이며, 전쟁의 갈망이요, 더욱이 초자연의 모든 비밀 속에서 정통한 환상의 마술사이자 예술가”라면서 독일인 또는 히틀러로 투사된 그를 찬양했다. “독일의 정신”(German psyche)을 분노한 신으로 인격화 한 융은 더 나아가 “밖에 서 있는 우리는 마치 책임 있는 대리인인 것처럼 너무 많이 독일인을 판단한다. 하지만 아마도 그들은 비폭력자라고 보면 거의 진리에 가까울 것이다.” 라고 했다.

희망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희망에 반하여 “융은 독일에 대한 구속(redemption)의 논거로서” 그의 성명들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하게 희망의 반대편에서” 작용했다고 브래스크(Per Brask)는 기록한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Wotan”(보탄)의 무의식에 대한 그의 신비주의적 인종차별은 알프레드 로젠버그(Alfred Rosenberg)의 “히틀러의 수석 이데올로기” 이론과 함께 완벽하게 일치했다. 융에 관한 이같은 모순들과 마찬가지로 상황도 복잡했다. 1942년 Omnibook Magazine에 의해 출판된 1938년 인터뷰에서 융은 히틀러에 대한 독일 숭배와 “열등감을 가진 사람의 특성”인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욕구를 비교하면서 이러한 혼란스러운 개념들을 반복해서 이어갔다. 그는 “마술적” 형태로서의 히틀러의 힘을 묘사한다. 그러면서 “그 힘은 히틀러가 듣고 순종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자신의 무의식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며, 독일 사람 자신들 즉, 7천 8백만의 독일인의 무의식에 투사된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강력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다른 말로 하면 독일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융의 관찰은 과장된 것이지만 그들은 착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사로 잡힐 수 있으나 그것은 분명 그들의 의지이다.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닌 나치 지도자가 제정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융은 말하기를 “진정한 리더는 항상 이끌고 나가는 것”이라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함께 관찰하면서 더 어두운 그림을 그려나갔다.

히틀러는 무솔리니(Mussolini)와 비교했을 때 옷이나 로봇의 가면과 같은 마스크가 있는 오토 마톤(automaton) 같았다. 자신을 거죽이 덮인 일종의 나무 받침대 같은 인상이 들도록 만들었다. 어떤 공연을 관람할 때도 그는 결코 웃지 않았다. 마치 그가 유머 감각이 전혀 없거나 나쁜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인간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모든 표현에서 유머 감각이 없는 비인간적인 인상으로 보이려는 목적은 단 하나, 그는 마치 진짜 사람의 두 배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 위했던 것이다. 그런 의도를 매커니즘으로 신체의 맹장처럼 의도적으로 숨겼다.

히틀러와 함께라면 당신이 남자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히틀러와 함께 있었다면 의사 또는 영적인 형상 또는 반신(demi-deity, 半神), 또는 더 나아가 신화와 함께 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그 남자와 결코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전체 국가였던 것이다. 그가 개인적인 친구가 없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과연 한 국가와 어떻게 친밀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융은 계속해서 보탄(Wotan) 숭배의 부활, “성경에서의 삼위, 제3제국과의 평행선”, 그리고 특히 융 학파 다른 고유한 공식 등 대한 논의를 계속한다. 융의 분석에 있어서, 니커보커(H.R. Knickerbocker)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나치의 이름과 상징에 대한 이 정신의학적 설명은 비전문가에겐 환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치당과 그 안내인(FÜHRER)에 대한 팩트만큼이나 환상적일 수 있을까? 단순히 그들을 갱이라고 부를 때 설명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설명 될 수 있어야 한다.”

cf. openculture.com.

‘레이디 맥베스’(2017), 여성에게 찬탈한 권력

1. 원작과 재해석 작품들

“‘레이디 맥베스’는 과도한 권력욕이 가져오는 종말을 사유하는 작품입니다. 굳이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현 시국’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지요.”

이 말은 지난 해 12월, 창극 ‘레이디 맥베스’를 연출한 한태숙씨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탐욕을 다룬 작품의 주제의식이 ‘현재의 세태’와 맞닿아 있다고도 말했다. 기자는 이것이 ‘최순실 게이트’의 시국을 연상시킨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2016.12.16.)

§

영화 <레이디 맥베스>(2017)는 이 창극의 원작이기도 한 소설 Lady Macbeth of Mtsensk(무첸스크군[郡]의 맥베스 부인)을 19세기 영국 배경으로 재해석해 만든 영화다. 러시아의 문호 니콜라이 레스코프(Лесков, Ииколай)가 쓴 이 소설 제목에서 ‘무첸스크’라는 지명이 우리나라에서는 낯설기 때문에 소담출판사의 문고판(bestseller minibook 20)으로 출간될 당시에는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번역된 바 있다.

원작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은 그 외에도 뮤지컬 등 여러 버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레이디 맥베스’가 진정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가 오페라로 작곡하면서이다. 1934년에 초연된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성적 묘사로 비판과 찬사 속에서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부르주아지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상연이 금지된 이력이 있다.

2. 레이디가 맥베스인가, 맥베스의 레이디인가

‘맥베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레이디 맥베스’라는 명칭은 ‘어떤 여자가 마치 맥베스 같다’(A Lady as Macbeth)는 뜻인가, 아니면 ‘어떤 여자가 맥베스의 여인(Macbeth’s wife)’이라는 소리인가?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보면 레이디는 이미 완전히 독립적인 인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의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이 분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만약 ‘레이디 맥베스’(여자 맥베스)라면 ‘여성의 권력화’가 주제겠지만, 그게 아닌 ‘맥베스의 레이디’라면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즉 ‘권력의 여성화’로 주제가 바뀌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태’를 연출했다는 저 창극은 ‘여성의 권력화’를 다루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여성화’를 다루었다는 것인가? 참고로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에서의 ‘레이디 맥베스’는 분명한 ‘권력의 여성화’를 묘사한다. 왜냐하면, 맥베스의 아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Vivien Leigh as Lady Macbeth at Stratford upon Avon 1955.

“…그렇다면 그런 중대사를 당신으로 하여금 저에게 제안하게 했던 것은 무슨 짐승이었던가요? 그런 포부를 피력하셨던 바로 그 때야 말로 당신께서는 대장부이셨습니다. 그러하오니, 그 전 보다도 더 대담한 모습을 보이시면 당신께서는 그만큼 더 대장부답게 되실 것이옵니다. 그 당시에는 시간도, 장소도 적당치 못하였지만, 그래도 그 두 가지 조건을 마련해 보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두 조건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보니, 그 절호의 기회가 당신을 나약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젖을 빨려본 적이 있어서 제 젖을 빨고 있는 어린 것이 얼마나 귀여운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처럼 맹세를 했다면 그 어린 것이 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방실 방실 웃고 있다고 해도, 이빨도 나지 않은 그 말랑말랑한 잇몸에서 내 젖꼭지를 빼내고, 메어쳐서 그 머리를 부셔버렸을 것이옵니다.”
[맥베스, 제6장 인버네스. 맥베스의 성 앞에서 맥베스 아내의 말]

3. 「맥베스」 에서 「레이디 맥베스」로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와 뱅코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던 중에 마녀 세 명을 만난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는 “코다의 영주, 미래의 왕”이라는 예언을 하고, 뱅코에게는 “자손이 왕이 되실 분”이라는 예언을 한다. 무슨 망발이냐는 반응을 보이던 맥베스는 막상 첫 예언이 맞아떨어지자(왕이 개선장군인 그를 보자마자 영주로 임명한 것) 예언을 직접 손수 실행에 옮겨나간다. 왕을 암살한 것이다. 이때 맥베스의 아내는 미묘한 양가감정 속에서 주저하는 남편 맥베스를 충동하여 거사를 치를 수 있도록 도모한다. 자기네 성에 국왕 던컨이 방문한 것을 적기로 잡아, 왕을 살해하고서 도망친 왕자에게 누명을 씌운 뒤 남편으로 하여금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다.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살인은 살인이 살인을 낳았다. 모든 비밀을 아는 뱅코를 살해하고, 귀족 맥더프가 왕자 맬컴 편에 붙어 도망치자 그의 처자식을 살해한다. 이 같은 학살극 속에 맥베스의 아내는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맥베스는 망령에 시달리다가 다시 마녀들을 찾아간다. 새로운 예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마녀들은 여자에게서 태어 난 자는 결코 맥베스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일러준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최후의 격전에서 맥더프가 바로 여자에게서 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절망에 빠진다. 맥더프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게 아니라, 찢어진 어머니 태에서 꺼낸 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맥베스는 맥더프 손에 죽고, 왕위는 다시 맬컴 왕자에게로 돌아간다. 여기까지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줄거리이다.

이와 같이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떠올리면서 보면 대체 <레이디 맥베스>가 어디를 봐서 ‘(여자) 맥베스라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즉 가장 ‘맥베스’다운 부분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누락된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한 빈농의 딸 카타리나는 기대와는 달리 집에만 갇혀지내는 신세가 된다. 24살 밖에 안 된 카타리나는 무심한 남편 보리스의 억압뿐 아니라 시부(媤父) 지노비의 타박에 가중된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던 카타리나는 하인 세르게이와 사랑에 빠지고, 욕망이 깊어져 급기야 사랑에 방해가 되는 시부와 남편을 차례로 제거한다. 남편은 독버섯으로 죽이고 시부 지노비는 세르게이와 목 졸라 죽인 것이다. 간섭할 사람이 없어진 카타리나는 하인들의 눈총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세르게이와 사랑을 나누지만 얼마 안 있어 죽은 남편의 다른 상속자인 어린 조카가 등장하자 그 조카마저 살해한다. 결국 둘은 결혼 직전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감옥으로 향하는 행렬에 끌려간다. 그 행군의 와중에 세르게이가 소네트카라는 다른 미녀와 바람을 피우자 카타리나는 그녀와 강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다. 여기까지가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의 줄거리다.

여성의 욕망은 창조적으로 부각되었지만, 「맥베스」다운 맥베스 고유의 욕망이 보전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이 한가지, 곧 ‘예언’ 플롯이 빠지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빠져있는 것이다. 맥베스 고유의 욕망이란 ‘예언’을 전적인 타자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가적인 충동의 동기로 활용하는 교활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맥베스에게 내려진 신탁(oracle)은 예언이 아닌 국왕 암살의 정당성이 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은 ‘여성의 권력화’에 대한 기호가 되었다. 여성의 욕망 곧, 여성성에 관한 극한의 자유만이 부각된 것이다.

이 예언 플롯이 창조적으로 복원된 것은 바로 영화 <레이디 맥베스>에서이다. 이 영화는 영국 출신 감독(William Oldroyd)에 의해, 영국을 배경으로 재해석된 영화인데,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 원작이 러시아에서 다시 영국 작품으로 되돌아오면서 맥베스 고유의 플롯이 되살아 난 것이다. 창조적인 기호를 통해서.

이를 테면, 캐서린(카타리나)의 남편 보리스는 침실에서 아내에게 이렇게만 말할 뿐이다.

“Don’t smile.” (웃지마.)
“Take off your dress.” (벗어)
“Face the wall.” (벽 보고 서.)

달콤한 첫날밤은커녕 남편은 밤마다 저런 명령만 반복한다. 침실에서 말 할 수 있는 권리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다. 결혼이후 단 한 번도 아내를 안아준 적이 없다. 심지어 남편은 벗은 아내의 뒷모습만 감상하다가 잠들지언정 아내의 몸엔 손도 대지 않는다. 성기능 장애가 있는 것일까? 영화는 그런 상상을 일축한다. 남편이 살해당한 후,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가 상속자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침실에서의 저런 기이한 권위 행태는 ‘쾌락도 남성만의 권리’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도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마찬가지로 예언의 플롯은 없지만 이 고압적인 권위의 언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예언 플롯을 대체한다. 맥베스의 욕망이 예언에 잠식당해 자신의 행동이 지배 받았던 것이라면, <레이디 맥베스>는 어느새 저 명령의 언어에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하인 세바스찬을 처음 대면했을 때, 캐서린은 자기도 모르게 세바스찬을 이런 언어로 다루고 있었다.

“Don’t smile.” (웃지마.)
“Face the wall.” (벽 보고 서.)

비로소 남성을 다루는 여성이 된 것이다. 이는 맥베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예언을 장악해 스스로 예언을 성취해 내는 것과 일반이다. 따라서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에 담겨있던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즉 ‘권력의 여성화’를 창조적인 기호로 복원한 셈이다.

4.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이와 같은 시대적 여성의 욕망 곧, 여성성의 자유가 부각된 플롯을 대할 때면 우리는 대개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 즉, 부권 사회와 모권 사회 간의 대립으로 보기 십상이지만 권력 자체는 여성화를 띤다.

욕망하는 여성만이 권력화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탐하는 모든 실력자들이 여성화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앞서 창극 <레이디 맥베스>를 취재했던 기사에서, 지난해 시점이었던 ‘현재의 세태’를 여성들이 욕망했던 ‘여성의 권력화’로 특정하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권력의 쟁취와 찬탈은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맥베스」에서는 ‘레이디 맥베스’ 곧 맥베스의 아내가 그 예언을 정당성으로 둔갑시키는 일을 담당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통계가 예언을 대신하고 그 여성의 일 즉, 예언을 정당성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주로 언론이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치고 찢어진 어머니 태에서 꺼내지지 않은 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에필로그:

역사적 캐서린은 이 영화 주인공과 이름이 같다. 스페인 출신의 그녀는 영국으로 시집을 왔는데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신랑과 함께 병이 들어버렸다. 신랑은 죽고 캐서린만 살아남았다. 시아버지 헨리 7세는 죽은 아들의 동생을 새신랑으로 주기로 약속했다. 실은 스페인과의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아예 파혼을 유보했던 것일 뿐 실제로 둘째 아들을 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처음 시집 온지 8년 만에 20살짜리 시동생과 결혼할 수 있었다. 비로소 정실 왕비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첫딸 메리를 낳은 후 폐경기를 맞은 캐서린을 버리고 하녀와 불륜에 빠졌다. 남편 헨리 8세는 내친김에 아예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싶어 했다. 이유는 형과 결혼한 적이 있었고, 처녀도 아니고… 당시 결혼의 무효화는 교황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열 받아 새로 차린 게 ‘성공회’였다.

참고로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ㅡ’ 결혼 축복성가와 함께 시작되는 이 영화에서 기독교 사제는 캐서린이 시부와 남편 없는 사이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닐 때 감시자 역할을 한다. 캐서린이 돌아다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심방을 와서는 돌아다닐 것을 자제하라 권면하기 때문이다. 남편 역시 캐서린을 다그칠 때, “집에서 성경책이나 읽으라”고 명령한다.

겟아웃(Get Out! 2017), 링컨, 마틴 루터 킹, 오바마, 그리고 노무현

영화 <겟아웃>을 관람하면서 나에게는 대번에 이런 생각들이 솟구쳤다. “만약 링컨 대통령이 살아서 이 영화를 본다면 뭐라 말했을까?”, “링컨은 흑인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원하기는 했을까?”

§

1. 다양하게 진화된 흑과 백의 논리

영화에서는 일찍 도입부터 기호의 배열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흑백 대비의 연속된 포토그라피는(아마도 주인공의 작품들인 듯) 흑색과 백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지지만 드러나지 않게, 하지만 공공연하게 백색이 더 강조 된다. 이를테면 백인 여성이 검정 옷, 검정 선글라스, 검정 모자를 착용하고서 목줄을 맨 개를 데리고 걷는데 본래 그런 종의 개는 유색일 텐데도 사진 상에서는 아주 흰 색이다. 흑백으로 현상되었기 때문이다.

@ photographer Philipp Balunovic.

즉, 본래는 컬러가 있는 개인데도 흑백사진인 덕택으로 흰색 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호는 복합적 의미를 띤다. ‘개도 흰색이어야 하는가?’ 라는 반감으로부터 이내 ‘우리는(유색인인 경우) 흑백 영상일 때 안정감이 든다’는 동질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화된 흑과 백의 논리를 체험케 한다.

컬러 화면으로 바뀐 아침 장면, 주인공 크리스가 면도를 할 때 면도기가 흰색인 것도 특이하다. 쉐이빙폼이 흰색인 것은 그렇다 쳐도 그의 검은 색 피부에서 털을 깎아내는 면도기가 흰색인 것은 이상할 정도로 피부색과의 대조를 이룬다. 이 친구는 백인이 되고 싶은 것일까?

어쨌든 이 흑인 사진작가 크리스가 백인 여자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으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는 여자 친구의 지적인 백인 집안 일가와 그들의 백인 친구들이 심리학적이면서도 생물학적인 기술을 동원해 탐스럽고 건강한 흑인의 육체를 강탈하고 백인 자신의 정신을 이식해서는 영생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흑인은 신체적으로는 이용당하고, 정신은 죽는다는 게 이 영화의 요지이다.

따라서 <겟 아웃>(Get Out)이란 말 그대로 “떠나라!”는 교시인 셈이다.

감독은 물론 흑인이다.

겟아웃 감독 조던 필레(Jordan Peele, 38)

2. 미국 내 산상수훈의 두 뿌리

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만약 링컨 대통령이 살아서 이 영화를 본다면 뭐라 말했을까? 흑인이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까지 그가 원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저렇게 숙고된 기호의 배열들을 오로지 흑과 백의 대비 속에서, 특히 흑의 피해의식으로 점철시키더니 이내 그것은 미합중국 대통령이 흑인에서 백인으로 교체된데 대한 개탄과 절망 그리고 자조를 피력하는데 다 소진을 해버린 것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흑인인 전임 대통령과 백인인 현 대통령은 한 영토 내의 다른 나라 대통령들인가 아니면 한 나라의 다른 인종을 대표하는 대통령인가? 이런 근본적 이질감이 링컨 대통령을 불러 올린 것이다.

역사수정주의자는 남북전쟁의 발발을 남북 간 노동시장의 불균형이지(노예들이 남쪽에 몰려있었다고 한다) 인권이 모토는 아니었다는 궤변을 좋아하지만, 링컨은 여전히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꼽히는(2015년 美 정치학회) 대통령이며, 특히 그가 재선 취임 연설에서 언급했던 다음 맥락은 국가로서 미국의 핵심 국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테제는 남북전쟁이라는 흑과 백을 놓고 벌인 유혈의 화급한 시국에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도 서로 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였습니다…<중략>…사람이 다른 사람 얼굴 위에 흐르는 땀으로부터 자신이 빵을 착취하기 위해서 정의의 하나님 도움을 구하려 한다면 미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중략>…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생략>”

보다시피 기독교 성서 맥락 그대로, 특히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위대한 설교로 꼽히는 산상수훈 중 결론부가(마 7:1) 골조를 이루고 있다. 이 테제는 다양성의 질서를 정리하여 지금의 균형에 올려놓았다 해도 과언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이 중심 사상의 뿌리에서 나온 대통령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바마 대통령 초선 및 재선 당시 대부분의 뉴스 헤드라인들은 다음과 같은 문안 일색이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 가장 존경” – 뉴스앤조이(2006. 10.18)

[오바마 대통령 취임] 40년만에 이룬 ‘마틴 루터 킹의 꿈‘ – 미주 중앙일보(2009.1.19.)

‘오바마’, 환호 속에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재연 : 미주·중남미 : 기독일보(2013. 8.29)

물론 마틴 루터 킹의 신앙 뿌리를 미국의 설립 가치와 유리시키는 관점이 넌센스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러한 관점은 결코 낭설이 아니다.

지난 2006년에 작고한 인문학의 거장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은 자신의 역작 ‘Jesus Through the Centuries’에서 마틴 루터 킹의 신앙의 핵심 가치를 링컨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신앙 가치와는 다른 루트로 지목한 일이 있다.

그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남아프리카의 한 젊은 변호사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통해 그 루트를 발견한다.

“나는 오래 살면 살수록,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 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지금 내가 특별히 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또 내 생각에 극히 중대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것은 무저항주의(nonresistance)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모든 오해와 왜곡을 떠난 사랑의 가르침 자체입니다….이 법은 인도, 중국, 유대, 그리스, 로마 등 세계 모든 성인에 의해 전해졌습니다…기독교 문명 전체는 표면적으로는 극히 찬란하지만, 그것은 (해방자로서 예수의 참된 가르침의) 명백하고도 미숙한 오해 위에서, 그리고 무의식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의식적인 오해 위에 성장해 왔습니다…. 열아홉 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독교가 필요하다든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독교를 지지하는 군대나 폭력을 인정한다든지 하는 명백한 모순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한 모순은 조만간 아마도 곧 백일하에 드러나고 종지부를 찍을 것입니다. ‘당신의 영국, 우리의 러시아’에서…”

톨스토이가 죽기 2개월 전에 쓴 이 편지는 수신자인 그 남아프리카의 젊은 변호사가 톨스토이의 저서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하나님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아직도 그 인상이 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의 독립된 사고, 깊은 도덕, 그리고 신뢰성 앞에는 다른 모든 기독교의 책은 빛바래고 무의미한 것 같았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톨스토이에게 보내온 것에 대한 답장이었는데, 그 변호사는 인도 태생으로서, 다름 아닌 모한다스 간디(Mohandas K. Gandhi)였다.

이 루트를 추적한 펠리칸은 마틴 루터 킹이 신학교에 들어간 해가 톨스토이에게서 비폭력 저항을 전수 받은 간디가 세상을 떠난 1948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신론(神論) 관련 학위논문 도서목록에는 다른 신학생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마하트마 간디의 저서들이 포함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미국 시민 마틴 루터 킹은 노예 해방자 링컨의 후예인가, 비 기독교인 간디의 후예인가? 물론, 간디는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마 5:39)는 산상수훈을 몸소 실천한 톨스토이의 저항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리 하여 단일의 산상수훈이 한 나라 안에서 두 뿌리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노예해방인가 흑인해방인가?

영화에서 우스운 장면이 하나 눈에 띄었다.

완전히 백인들로만 구성된 파티에 주인공 크리스가 불가피하게 참석했다. 온통 흰색이었다. 그런데 그중 두 명의 유색인도 있기는 했다. 한 명은 백인처럼 행동하는 흑인. 다른 한 명은 동양인이었다. 대담하게도 동양인이 크리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 질문 자체는 두 가지 의미를 띠는데 일본인으로 소개한 이런 종의 동양인은 한때 미국의 경제 가치에 도전하고 위협했던 일본의 버블 경제를 비꼬는 것일 수도 있고, 또 한 편으로는 동양인을 흑인보다 화이트에 가까운 지위로 보는, 도저히 현실에서 동떨어진 피해의식의 절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종차별을 논하자면 과연 동양인이, 이를테면 한국인이 흑인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할까? 버블 경제를 비꼰 것처럼 일정한 수준과 지위를 구가하는 유색인종의 지위는 언제나 경제력과 비례한다. 경제력을 갖추었을 때는 동양인뿐 아니라 흑인들도 자유로운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인습 속에서의 동양인은 어정쩡한 컬러일 뿐인 것이다. 오히려 흑인은 컬러풀하다.

따라서 영화에 배인 이와 같은 넌센스는 자신들의 국가인 미국의 건립가치를 대변하는 ‘노예해방’을 ‘흑인해방’으로만 오인한 데서 비롯 된다.

노예해방은 흑인해방이라는 낮은 단계의 이념보다 높은 이념이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을 흑인해방으로 점유하듯, 과잉된 이 해방의 원리는 오바마 임기 당시에 절정을 이룬 해방의 신개념 ‘PC’가 바로 그것이다. 오바마 다음 대통령인 트럼프의 당선 당시 언론은 “PC의 끝장”이라는 언급을 자주했는데 PC란 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공정성)의 약자로서 다음과 같은 개념이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주창하는 이 개념은 성차별/인종차별에 준한 언어 사용이나 활동에 저항해 그걸 바로 잡겠다는 기치로 시작하여 이른바, ‘마이너리티’에게 불쾌감을 주는 표현을 시정케 하는 캠페인으로 미국 각지의 대학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전개되다가 오바마 당시에 절정에 달한 것이다.

가령, ‘불구자(disabled)’를 ‘장애인(handicapped)’으로 부르는 것이 그 예인데, 미국에선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 ‘능력을 달리 타고난(differently abled)’으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체적으로 도전받은(physically challenged)’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런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선 ‘장애우’라는 말이 등장했다. 참고로 대표적인 PC 표현법이다.

black→African-American, Oriental→Asian-American, Indian→Native American, housewife→domestic engineer, fireman firefighter, stewardess→flight attendant, postman→post person, policemen→law enforcement officer, prostitute→sex surrogate, human·mankind→earth children, blind→optically darker, deaf→visually oriented, poor→economically unprepared, drug addict→chemically challenged, bald→ comb-free.

뿐만 아니라 이들은 그간 대학에서 가르쳐 온 ‘위대한 책들’이니 ‘걸작’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서구 백인들의 문화유산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소수 인종 문학 텍스트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나이에 대한 차별(ageism),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차별(heterosexism), 외모에 대한 차별(lookism), 신체의 능력에 대한 차별(ableism) 등 그야말로 말그대로 모든 종류의 차별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외연을 확장해나갔다.

오바마 임기 내에 “종교적 이유로 술 배달 거부로 해고된 무슬림에게 약 3억 배상 판결”이 났다든지, 미국에서 동성애자 결혼이 합법화 된 것은 그 확장된 외연의 극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오바마가 당선되기 이전에 이미, 탈 권위 탈 기득권의 대명사로 꼽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권 변호사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 있다. 공교롭게도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는 남북전쟁 종식을 눈앞에 두고 했던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 연설문을 읽으면서 ‘정의를 내세워 승리한 사람’을 발견했다. 링컨은 선거에서 숱하게 떨어졌다. 대통령 재임중에는 누구보다도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노예제 폐지론자와 노예 소유자들이 모두 그를 공격했다. 인기도 없었다.”(「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

노 대통령께서 마틴 루터 킹이 아닌 링컨의 재선 취임 연설문에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에이브러햄 링컨의 재선 취임 연설문 전문

따라서 이글의 마지막으로 에이브러햄 링컨의 재선 취임 연설문 전문을 옮겨보고자 한다. 특별히 노무현 대통령께서 읽으셨다는 「월간조선」의 버전 그대로를 옮긴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대통령직 취임 선서를 위한 본인의 이 두 번째 자리는 첫 취임 식 때처럼 긴 연설을 할 계제가 아닙니다. 첫 취임식 때에 본인은 우리가 과연 어떤 길을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서 다소 자세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이 나라의 모든 눈과 힘은 여전히 남북 내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만, 지난 4년 간 남북 갈등에 관한 모든 문제와 모든 국면들에 관해서는 이미 수많은 공식 발표문들이 나왔기 때문에 본인이 지금 새삼 꺼내놓을 말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 모든 것은 전쟁의 진행 상황에 달려 있고 그 戰況(전황)은 본인은 물론 모든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상황은 우리 모두에게 대체로 만족스럽고 고무적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높은 희망을 갖지만 어떤 예측도 할 수 없습니다. 4년 전 이맘 때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임박한 內戰에 쏠려 있었습니다. 모두가 전쟁 발발을 두려워했고 모두가 전쟁만은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취임사를 하면서 본인은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미(美) 연방을 「구출」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이 도시 한쪽에서는 반란자들이 전쟁 아닌 방법으로 연방을 「파괴」하는 방안, 곧 합중국을 해체하고 협상을 통해 나라를 쪼개자는 안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에 반대하기는 양쪽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한쪽은 연방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연방을 죽이기보다는 전쟁이라 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나라 인구의 8분의 1이 흑인 노예들입니다. 그들은 이 나라 모든 지역에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남부 지역에 몰려 있습니다. 노예 소유는 특수하고도 강력한 이해관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이해관계가 남북전쟁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그 이해관계를 강화하고 영속화하며 확장하려는 것이 바로 반란자들의 목표였던 반면, 정부는 그 이해관계의 영토적 확장을 제한해야 한다 는 것 이상의 주장은 한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전쟁이 이처럼 규모가 커지고 이처럼 오래 계속되리라고는 어느 쪽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쪽도 남 북 갈등을 초래한 「원인」이 전쟁 종식의 순간에, 혹은 전쟁 종식 이전에 제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모두 손쉬운 승리를 기대했을 뿐 이처럼 근본 적이고 놀라운 결과가 초래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서로 상대방을 응징하는데 하나님의 도움이 있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남이 흘린 땀으로 자기 빵을 얻는 자들이 감히 정의로운 하나님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심판 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심판하지 않도록 합시다. 남북 어느 쪽의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쪽도 하나님의 충분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자신의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이 세상은 참으로 불행하여라. 이 세상에 죄악의 유혹은 있게 마련이나 남을 죄 짓게 하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도다.』 미국 의 노예제도가 바로 그 같은 세상의 죄 가운데 하나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있게 마련인 죄의 하나라고 한다면, 그러나 하나님이 정한 시간 동안 지속된 그 죄를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거두시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죄를 짓게 한 자들로 인한 재앙을 징벌하고자 하나님께서 남과 북으로 하여금 이 끔찍한 전쟁을 치르게 하신 것이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언제나 그 분의 것이라 생각하는 그 신성한 뜻이 아닌 다른 어떤 뜻을 우리가 이 전쟁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 거대한 재난의 전쟁이 하루 빨리 끝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품삯 한 푼 주지 않고 노예의 땀으로 모은 250년의 재산이 모두 다 탕진될 때까지, 3천 년 전의 말씀이 이르듯 채찍으로 남의 피를 흘리게 한 자가 스스로 칼에 맞아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자기 피로 되갚게 되는 날까지 이 전쟁을 지속시키려 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도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원한 갖지 말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보게 하신 그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안겨진 일을 끝내기 위해, 이 나라의 상처를 꿰매기 위해, 이 싸움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과 그의 미망인과 고아가 된 그의 아이를 돌보고 우리들 사이의, 그리고 모든 나라들과의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모든 일을 다 하기 위해 매진합시다.

에필로그.

이 노예해방의 가치를 노무현 대통령께서 정치 기반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사실인데, 하지만 그가 부재하는 지금은 두 가지 넌센스에 봉착해 있다. 그분의 이름을 기치로 내 거는 후예들은 노예해방보다는 흑인해방에 더 가까운 표지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 하나, 왜냐하면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한국형 PC가 발권되려 하는 시기이기 때문.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우리나라에는 흑인해방이 화두가 될 만큼의 흑인이 많지를 않고, 사실상의 노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모순은 한국형 귀족 노예라는 낯선 인종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흑인문학의 한 저명한 학자는 이런 질의를 던졌다고 한다.

“왜 마틴 루터 킹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왜 그의 철학을 받아들였는가?”

그 대답은 주저 없이, 링컨의 연설문과 톨스토이의 편지에 내재된 산상수훈의 저작권자 예수 그리스도의 압도적인 힘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고.

그럼에도 우리주변에는 이 산상수훈을 마르크시즘과 접목하는 변종이 더 많이 출몰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더우먼’의 기원

1. 원더우먼의 기원

한 사람이 어깨를 축 늘어진 채로 귀가 한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홀로 구석진 곳에 앉아 찡그린 얼굴로 고통을 참고 있다. 사냥하다가 검치호에게 물려 손목이 잘려나간 것이다. 사냥이 생업인 남성에게 손이 없다는 사실은 사형선고다. 그의 집인 동굴에는 한 사람이 더 있다. 여성이다. 임신한 여성.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남성은 손이 잘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여성이 계속 다가와서 위로한다. 이 여성이 측은해 하는 눈길을 자기에게 보낸 순간, 이 남자는 갑자기 여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사냥에 쓰는 몽둥이로 후려갈긴다. 제정신이 돌아와 보니 여자는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죽은 여자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하늘로 빠르게 올라간다. ‘검치호’…윗니 두 개가 휘어진 칼처럼 생긴 호랑이, 이런 짐승이 출몰하던 이 때는 바로 기원전 3만년.

이상은, 1987년에 출판된 「원더우먼」의 프롤로그 한 대목이다.

저런 일이 기원전 3만년에 벌어진 후, 훌쩍 시·공간을 뛰어넘은 기원전 1200년,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바뀐 시·공간은 올림푸스 신전. 신에 대한 경시 풍조가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함으로써 올림푸스 신들은 과연 이 지상계를 어떻게 처리할지 천상회의를 열고 있다.

군신(軍神) 아레스는 인간이란 오로지 폭력으로써만 다스릴 수 있다고 강변하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였다. 반면 다산(多産)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폭력이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므로, 지상계에서 모범이 될 만한 새로운 종족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같은 여성인 지혜의 여신 아테나도 아르테미스의 의견을 지지했으며, 비록 남성 신이었지만 아폴론 역시 아르테미스의 대안에 수긍했다.

대부분 아르테미스의 안을 좋게 여겼지만 회의는 결렬된다. 아레스가 끝까지 전쟁론을 굽히지 않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남은 신들은 서둘러 하계로 내려갔다.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 설령 갔더라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하계로 내려간 것이다. 헤스티아, 데메테르, 아프로디테, 세 명의 여신도 미리 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다섯 여신은 카론의 나룻배를 타고 스틱스 강을 건너 남성들에 의해 죽임 당한 여성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는 곳에 당도했다.

이 하계란 한 마디로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궁이었다. 가엾게 죽어간 여성들을 언젠가는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가이아 자신의 태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 여신이 생명을 불어넣자 수많은 영혼이 가이아의 자궁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강물의 거품으로 되살아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은 이 여성들은 다섯 여신에게서 선물을 받는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진리와 정의’를, 사냥과 다산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기술’을, 데메테르는 풍요로운 대지를, 헤스티아는 ‘도시’를,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힘’을 주었다. 그렇게 살아난 여성 중에서 히폴리테를 여왕으로 세우며 가이아의 허리띠를 선사하고, 안티오페로 하여금 히폴리테를 보필하게 했다.

히폴리테와 안티오페가 이끄는 이 새로운 여성 종족 ‘아마존’ 가운데는 앞서 기원전 3만년에 남편에게 머리를 맞고 죽었던 그 여자의 영혼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원더우먼의 기원은 ‘흙으로 여성을 빚어 제우스가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신화가 아니라, 앞서 남자에게 맞고 머리가 깨져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난 여성성, 바로 그것이 <원더우먼>의 가장 본질적인 기원이라 할 수 있다.

학대 받는 여성의 해방, 이것이 원더우먼의 시원인 ‘아마존’의 본령이기 때문이다.

2. 원더우먼의 고향 아마존의 창설 원리

아마존(Ἀμαζών)이라는 말은 복수형인 아마조네스(Ἀμαζόνες)의 단수로서 통상 희랍어에서 접두사로서 α는 부정을 뜻하기에 마조스(μαζός, 유방) 한 쪽이 없다는 뜻이 된다. 활을 잘 쏘기 위해 일부러 없앴다는 전설이 있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며 다만, 필요에 의한 여성성의 부분적 제거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다.

아마존은 실존하는 종족이 아니다. 상기의 재구성 시나리오에서도 나타났듯이 신화적 존재다. 그렇지만 신화적 존재라는 말은 전혀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 또한 아니다. 어떤 의미로서든, 존재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19세기 고전학의 거장 요한 야콥 바호펜(Johann Jacob Bachofen)은 인류 문화 단계를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소개한 바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야만의 단계, 두 번째는 가모장제의 단계, 세 번째가 비로소 가부장제 단계인데, 그 과정은 마치 헤겔의 역사 발전 이론의 신화적 버전이기라도 한 듯, 단계가 단계를 대체하는 과정이 실로 흥미롭다.

우선 첫 번째 야만의 단계이다. 바호펜은 이 단계를 ‘헤테로’(hetero)라 부른다. 헤테로는 ‘양쪽 모두’라는 뜻이다. 성적인 혼돈 상태를 일컫는 ‘헤타이리즘’(hetairism)이 바로 이 헤테로에서 나온 말이다. 이 시기는 남성이나 여성 어느 한 쪽이 지배 세력이 되지 않았던 때라고 한다. 이 단계는 성적으로 혼돈의 시대이기에 어린 애들은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던 시대요, 여성들 자신도 신체적으로 완전히 무방비의 상태였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강간이 결혼을 대신했으며,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바호펜은 특히 이 시대를 아프로디테의 시대라고 상징 지었다. 아프로디테는 성적으로 분방한 여신이다.

두 번째 단계는 가모장제. 이 시기에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서로 뭉쳐서 살았으며, 헤타이리즘의 혼돈에서 가모장제 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이 단계는 일종의 문명이기에 농업, 법, 예술이 생겨난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신에 대한 숭배 역시 모성애/ 어머니 신을 숭배하게 되므로 바호펜은 데메테르를 이 단계의 상징 신으로 지정했다. 다만, 하계의 남성신 하데스는 여전히 여성을 감금한다.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붙잡아다가 어머니와 갈라놓은 것이다. 이는 남성과의 결혼의 의미일 것이다. 바호펜은 여기서 바로 여전사 종족 아마조네스, 즉 자기 방어를 위해 무리지어 다니는 여성 종족과 이 시기를 연결 짓는다.

끝으로 세 번째 단계는 가부장제. 여기서 만나는 것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다. 오이디푸스는 헤타이리즘이라는 구시대의 상징인 스핑크스를 제거한다. 스핑크스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가진 추니(암수동체)이다. 아울러 테베의 통치자인 자기 어머니와 결혼한 것은 오이디푸스의 어머니 즉, 가모장의 철저한 몰락과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바호펜은 역설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에도 아마조네스는 존재할까? 누가 아마조네스인가.

3. 현대의 아마존, 원더우먼

현대의 아마조네스는 원더우먼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그녀들은 영화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생생한 실제 상황 속에서 여전히 건재 한다.

이를테면, 1998년에 나온 영화 <풀 몬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말 그대로 ‘몽땅 벗는다’(Full Monty)는 뜻의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대개 외설적인 남성 스트립쇼 영화라는 정도로 알려졌지만 이 영화 배후에는 그 어떤 원더우먼보다 실존적인 원더우먼이 자리해 있었다.

이 영화는 20세기 끝자락에 일어난 영국의 대 공황을 배경으로 한다. 수많은 남성들이 실직했던 시절, 실직한 남성들이 ‘용기’를 내어 (여성이 주로 하는 직업인) 스트립쇼로 돈을 벌기로 작심한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그 스트립쇼라는 ‘성’ 행위의 주체와 객체 간의 성을 바꾸도록 만든 아마존 곧, 원더우먼이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이면적 주제였다. 그 현대판 아마존의 이름은 다름 아닌 마거렛 대처(Margaret Thatcher)였다.

당시 영국 남성들은 이 여성 수상의 정책 때문에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원더우먼 덕택에 당시의 영국은 20년 뒤의 영국이 EU라고 하는 유럽의 거대 경제 연합을 가장 먼저 탈퇴해도(Brexit) 건재할 수 있는 저력의 발판을 닦아 놓았다.

그런가하면 그 EU의 주도국 중의 한 국가인 독일에는 ‘이민자의 어머니’라고 불리울 정도로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친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라는 현직 총리가 있다. 이 여성 역시 아마조네스의 일인이다. 이 원더우먼 덕택에 죽어가던 수많은 이민자가 독일 땅을 손쉽게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민자의 어머니’ 품에서 수많은 남성들은 폭력, 특히 여성을 집단으로 강간하는 행위를 마음 놓고 저질렀다. 대표적인 예가 2015년에서 2016년으로 넘어가는 신년맞이 시즌에 벌어진 집단 성폭력 사건이다. 당시 독일 쾰른에서는 약 1000여명의 중동, 북아프리카 출신 난민 신청자(asylum seeker)가 행인을 대상으로 성폭력, 강/절도 등의 무차별적 범죄를 일으켰는데, 이들의 폭력은 대부분 여성을 노린 성범죄로 이어졌다.

▲침을 뿌리면 성폭행 대상이라는 표시라고 한다.

심지어는 메르켈 총리와 인증 사진을 찍은 한 청년은 실제 테러리스트였던 사실이 보도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이반(離叛) 사태에도 불구하고, 2017년 4월 1일자 현재, 이민자에 대한 정책 기조를 버리지 않고 있음이 파악되었다. 당시 주례 팟캐스트 방송에서 그녀는 이르기를 “독일인들은 난민들에게 개방적이어야 하며 이민자로부터 더 많이 배우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종래의 기조를 유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과연 이런 기조가 ‘이민자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였어도 가능했을까?

 

4. 한국의 아마존, 원더우먼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성 대통령이 당선된 바 있다. 당시에는 전국민 51.55%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탄핵 사태를 맞으며 지난 해 3월 구속 상태로 재판에 계류되다 무려 1년이 넘어선 올해 4월이 되어서야 징역 24년·벌금 180억원의 1심 판결을 받았다. 당시 언론은 ‘불륜 밀회설’, ‘마약 복용설’… 등 독신 여성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적인 의혹들을 불러일으켰지만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 여성 대통령도 (임기 기간이나마) 대한민국의 원더우먼이었을까? 가당치 않다고 여길 사람이 훨씬 많아졌을 시점이지만, 그녀가 아마존(Ἀμαζών)이었던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권력의 박탈과 이행 속에서 바호펜의 방법적 가설인 바, 헤타이리즘의 혼돈에서부터 가부장권의 복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그런 양성 간의 혼돈(hetairism)으로 시작한 가모(家母)에서 가부(家父)로의 이행은 실질적인 남성 정치인 집단보다는 여성 정치인의 남성화로 심화되는 양상을 띠더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양상이었다.

모든 여성성의 본성은 그 모성 성의 풍부에 있기 때문이다. 모성의 상실이 아니고서야 어찌 머리를 얻어 맞은 여성에 대해 다수의 여성(특히 여성 정치인)들은 그리도 매정하고 가혹할 수 있었던가.

여성 정치인은 본질상 모두 아마존이다. 현대에 들어 그것은 더욱, 창설 원리를 여성성 보호의 원리로 선전한다. 하지만 실상은 자기 종족을 죽이기 위한 ‘아+마존’ 행위(α + μαζός) 곧, 여성성 제거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 현대적 의미의 아마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걷는다. 같은 여성을 후려치는 여성들인 셈이다.

이러한 양상은 선거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스토리, 남성 정치인의 불륜 드라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이를 테면 평소 ‘사이다’로 불리우던 경기도 거점의 한 유망 남성 정치인과 힘 없는 여배우 간의 공방도 바로 그런 것이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이 분들의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은 과연 자신들이 참된 페미니스트인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정치와 결부된 성 문제가 대두되면 여성이 먼저 유혹한 것처럼 되고, 그런 오도를 해당 여성이 항의하면 여성이 물질을 조건으로 협박한 것이 되고, 결국에는 여성이 가해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이때 여성들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

가슴을 드러내놓는 여성 운동은 했지만 사실은 주로 공격 대상은 언제나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성 대통령에게 가혹했던 것이나 나이 들어 힘 없는 여성 배우만을 몰아부치던 일은 다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놓고 반발하는 남자 짓이라든지, 특정 남성 정치인들과의 이념 성 공유에 우선하는 나머지 여성 성은 도무지 보호하지 않는 태도라든지, 그런 것들은 모두 남성화 된 여성의 성징이지 여성화 페미니즘이라 볼 순 없는 것이다.

§

끝으로 이 글 가장 앞에서 글 요약으로 보았던 ‘1987년 판 원더우면 프롤로그’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보려 한다. 여성성에 대한 남성성의 컴플렉스가 대단히 잘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성은 어떠한 기저로 인해 여성성에 대해 잔인해지는지, 또한 여성성이 남성화 되고 싶어 할 때 남성과 공유하게 되는 바로 그 기제는 어떤 것인지.

 

에필로그: 원더우먼 1987년판 프롤로그 풀 페이지

이 프롤로그는 조지 페레즈(George Pérez)와 렌 웨인(Len Wein)이라는 만화 작가가 재구성해 낸 것이다.

The gods are dead, killed by one God. Between the men of the new and those of ancient times there will no longer be a thought in common.
“신들은 죽임을 당하되, 한 신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과 고대의 사람들 사이에는 이제 더 이상 공통된 생각은 없는 듯하다.”ㅡ페르디낭디 로트

30000 B.C. Today, your tribe cast you out! they mocked you… called useless…called an animal.
3만년 전. 오늘 너의 종족은 무리에서 너를 내 쫓았다. 그들은 너를 조롱했고… 쓸모없는… 짐승이라 불렀다!

Only yesterday you were called a man! You hunted with men and fought with men.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너는 남자라 불렸다! 남자들과 사냥을 했고, 그리고 남자들과 싸웠다.

That was before you met the Sabertooth… the one who bested you…the one who took hand!
네가 세이버투스(윗니 두 개가 휘어진 칼처럼 생긴 호랑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누군가 너를 이기기 전까지는… 누군가 너의 손을 빼앗아가버리기 전까지는!

Now, You are a man no more. For men are hunters — and hunters need hands! That makes you afraid. But you must not show your fear.
지금의 넌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사냥꾼에게는 손이 필요하다! 그것이 너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너는 너의 두려움을 들키고 싶지 않다.

Remember what the tribe teaches:… Fear is for woman! So you hide your face — quell your trembling.
기억해둬라. 그 종족이 가르치는 게 무엇인지… “두려움은 여성들의 것이야!” 그래서 너는 너의 얼굴을 감추지. 그래서 너의 떠는 모습을 숨기지.

Still, somehow, she knows! And when she touches you… when you hear her sympathetic whining..
조용히…이게 다 어찌된 일인지…그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어! 그래서 그녀가 너를 만질 때… 그래서 그녀가 동정어린 음성으로 다가오는 것을 네가 들었을 때…

You curse her!
그녀를 향해 욕설을 퍼붓지!

So you pull away — But she insists! You try to ignore her — but her whimpering taunts you…teases you…emasculates you… makes you.. SNAP!
그리고 너는 밀쳐내지.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아! 그래서 너는 그녀를 무시하려고 하지. 그렇지만 그때 그녀의 울음은 너를 조롱하는 걸로 들리지…
너를 까는 소리로 들리지…
그래서…너로 하여금… 그녀를 한 대 치게 만들지.

And when your temper cools…when the echo of her scream has been swallowed by the air…
그러고나서 너의 끓어오르던 피가 다 식었을 즈음…그녀의 비명 소리가 공기속에 울려퍼질 때 즈음…

You hear it! A muffled stirring within her.
너는 그 소릴 듣지!
그녀의 숨이 꺼져가는 소리를.

And a voice…. as if from the earth itself…whispering…
그리고 한 목소리… 땅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면….

calling…beckoning…making something happen…and it makes you want to…
부르고…손짓하고…무슨 일인가 일어나게 만들고…그리고 그것은 너로 하여금…울부짓게 만들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좌경화 우경화 되는가?

고대에는 물체가 운동하는 것을 두고 그 물체에 어떤 힘이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있어 그렇다고 믿었다. 이를 테면 공을 힘껏 집어 던졌을 때 손의 힘을 벗어나도 공 자체가 계속 날아가는 원리를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런 수준의 이해였던 것을, 날아가는 공 자체의 표질에 어떤 에너지가 달라붙어 있다고 생각하거나(마치 불에 닿았던 쇠그릇에는 열기가 남아 있듯이) 혹은 그 공에 어떠한 힘이 실시간으로 계속 충격을 가해 운동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그 이해의 수준을 끌어 올린 것은 다름 아닌 갈릴레오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지동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공이 직선의 방향으로 날아가는 운동이 지속되기까지는 (그 표질에) 어떠한 외부적 힘도 필요로 하지 않고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완성해 낸 것은 바로 데카르트였다.

명실상부 ‘자연’의 개념이 창출된 것이다.

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모든 만물은 기계적으로, 스스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은 지동설의 본령으로 진입하게 됨에 따라 정신 운동은 더 이상 신적 요인이 아니었다.

모든 운동의 원리와 더불어 정신 활동도 이 지동설 원리에 소급된 것이다.

이 운동 원리에 입각하면, 인간의 뇌들이 좌회전을 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다. 공의 표질에 어떤 전하가 닿아서 날아가는 게 아니었듯이, 그 뇌에 어떤 진리가 묻어서 그걸 좇아 회전하는 게 아니며, 자연적으로 좌회전을 하는 것이다.

그런 뇌는 다른 어떠한 구조, 어떠한 환경에 갖다놓더라도 좌회전을 하기 마련이다. 그 뇌가 특별히 믿는 진리의 내용이 좌편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뇌가 항상 좌편으로 회전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운동이 정신 사유의 실체이며, 진리로 표방되는 각종 사물은 회전하는 사유의 연장(extensio)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보편자에서 개별자로,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급회전 됨에 따라 유신론에서 무신론이 증대됨 같이 우리 뇌의 좌경화는 원인이나 목적이 없는 지구의 자전과도 같은 것이 되었다.

이것이 주적(主敵)의 이론이 그 반대편의 진영에서도 자생적으로 추앙될 수 있는 원리이며, 또한 이것이 역사 수정주의의 축이 되었다.

한편, 우경화는 이 좌경화의 반동으로 일어나는 회전이며, 그런 점에서 좌경화와 우경화는 실상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