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베스’(2017), 여성에게 찬탈한 권력

1. 원작과 재해석 작품들

“‘레이디 맥베스’는 과도한 권력욕이 가져오는 종말을 사유하는 작품입니다. 굳이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현 시국’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지요.”

이 말은 지난 해 12월, 창극 ‘레이디 맥베스’를 연출한 한태숙씨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탐욕을 다룬 작품의 주제의식이 ‘현재의 세태’와 맞닿아 있다고도 말했다. 기자는 이것이 ‘최순실 게이트’의 시국을 연상시킨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2016.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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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이디 맥베스>(2017)는 이 창극의 원작이기도 한 소설 Lady Macbeth of Mtsensk(무첸스크군[郡]의 맥베스 부인)을 19세기 영국 배경으로 재해석해 만든 영화다. 러시아의 문호 니콜라이 레스코프(Лесков, Ииколай)가 쓴 이 소설 제목에서 ‘무첸스크’라는 지명이 우리나라에서는 낯설기 때문에 소담출판사의 문고판(bestseller minibook 20)으로 출간될 당시에는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으로 번역된 바 있다.

원작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은 그 외에도 뮤지컬 등 여러 버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레이디 맥베스’가 진정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가 오페라로 작곡하면서이다. 1934년에 초연된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성적 묘사로 비판과 찬사 속에서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부르주아지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러시아에서 상연이 금지된 이력이 있다.

2. 레이디가 맥베스인가, 맥베스의 레이디인가

‘맥베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레이디 맥베스’라는 명칭은 ‘어떤 여자가 마치 맥베스 같다’(A Lady as Macbeth)는 뜻인가, 아니면 ‘어떤 여자가 맥베스의 여인(Macbeth’s wife)’이라는 소리인가? 영화 <레이디 맥베스>를 보면 레이디는 이미 완전히 독립적인 인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의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이 분간이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만약 ‘레이디 맥베스’(여자 맥베스)라면 ‘여성의 권력화’가 주제겠지만, 그게 아닌 ‘맥베스의 레이디’라면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즉 ‘권력의 여성화’로 주제가 바뀌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태’를 연출했다는 저 창극은 ‘여성의 권력화’를 다루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여성화’를 다루었다는 것인가? 참고로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에서의 ‘레이디 맥베스’는 분명한 ‘권력의 여성화’를 묘사한다. 왜냐하면, 맥베스의 아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Vivien Leigh as Lady Macbeth at Stratford upon Avon 1955.

“…그렇다면 그런 중대사를 당신으로 하여금 저에게 제안하게 했던 것은 무슨 짐승이었던가요? 그런 포부를 피력하셨던 바로 그 때야 말로 당신께서는 대장부이셨습니다. 그러하오니, 그 전 보다도 더 대담한 모습을 보이시면 당신께서는 그만큼 더 대장부답게 되실 것이옵니다. 그 당시에는 시간도, 장소도 적당치 못하였지만, 그래도 그 두 가지 조건을 마련해 보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두 조건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보니, 그 절호의 기회가 당신을 나약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젖을 빨려본 적이 있어서 제 젖을 빨고 있는 어린 것이 얼마나 귀여운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제가 당신처럼 맹세를 했다면 그 어린 것이 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방실 방실 웃고 있다고 해도, 이빨도 나지 않은 그 말랑말랑한 잇몸에서 내 젖꼭지를 빼내고, 메어쳐서 그 머리를 부셔버렸을 것이옵니다.”
[맥베스, 제6장 인버네스. 맥베스의 성 앞에서 맥베스 아내의 말]

3. 「맥베스」 에서 「레이디 맥베스」로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와 뱅코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던 중에 마녀 세 명을 만난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는 “코다의 영주, 미래의 왕”이라는 예언을 하고, 뱅코에게는 “자손이 왕이 되실 분”이라는 예언을 한다. 무슨 망발이냐는 반응을 보이던 맥베스는 막상 첫 예언이 맞아떨어지자(왕이 개선장군인 그를 보자마자 영주로 임명한 것) 예언을 직접 손수 실행에 옮겨나간다. 왕을 암살한 것이다. 이때 맥베스의 아내는 미묘한 양가감정 속에서 주저하는 남편 맥베스를 충동하여 거사를 치를 수 있도록 도모한다. 자기네 성에 국왕 던컨이 방문한 것을 적기로 잡아, 왕을 살해하고서 도망친 왕자에게 누명을 씌운 뒤 남편으로 하여금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다.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살인은 살인이 살인을 낳았다. 모든 비밀을 아는 뱅코를 살해하고, 귀족 맥더프가 왕자 맬컴 편에 붙어 도망치자 그의 처자식을 살해한다. 이 같은 학살극 속에 맥베스의 아내는 죄책감으로 자살하고 맥베스는 망령에 시달리다가 다시 마녀들을 찾아간다. 새로운 예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마녀들은 여자에게서 태어 난 자는 결코 맥베스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일러준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최후의 격전에서 맥더프가 바로 여자에게서 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절망에 빠진다. 맥더프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게 아니라, 찢어진 어머니 태에서 꺼낸 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맥베스는 맥더프 손에 죽고, 왕위는 다시 맬컴 왕자에게로 돌아간다. 여기까지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줄거리이다.

이와 같이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떠올리면서 보면 대체 <레이디 맥베스>가 어디를 봐서 ‘(여자) 맥베스라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즉 가장 ‘맥베스’다운 부분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누락된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나이 많은 부자와 결혼한 빈농의 딸 카타리나는 기대와는 달리 집에만 갇혀지내는 신세가 된다. 24살 밖에 안 된 카타리나는 무심한 남편 보리스의 억압뿐 아니라 시부(媤父) 지노비의 타박에 가중된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던 카타리나는 하인 세르게이와 사랑에 빠지고, 욕망이 깊어져 급기야 사랑에 방해가 되는 시부와 남편을 차례로 제거한다. 남편은 독버섯으로 죽이고 시부 지노비는 세르게이와 목 졸라 죽인 것이다. 간섭할 사람이 없어진 카타리나는 하인들의 눈총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세르게이와 사랑을 나누지만 얼마 안 있어 죽은 남편의 다른 상속자인 어린 조카가 등장하자 그 조카마저 살해한다. 결국 둘은 결혼 직전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감옥으로 향하는 행렬에 끌려간다. 그 행군의 와중에 세르게이가 소네트카라는 다른 미녀와 바람을 피우자 카타리나는 그녀와 강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는다. 여기까지가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의 줄거리다.

여성의 욕망은 창조적으로 부각되었지만, 「맥베스」다운 맥베스 고유의 욕망이 보전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으로 이 한가지, 곧 ‘예언’ 플롯이 빠지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빠져있는 것이다. 맥베스 고유의 욕망이란 ‘예언’을 전적인 타자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가적인 충동의 동기로 활용하는 교활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맥베스에게 내려진 신탁(oracle)은 예언이 아닌 국왕 암살의 정당성이 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은 ‘여성의 권력화’에 대한 기호가 되었다. 여성의 욕망 곧, 여성성에 관한 극한의 자유만이 부각된 것이다.

이 예언 플롯이 창조적으로 복원된 것은 바로 영화 <레이디 맥베스>에서이다. 이 영화는 영국 출신 감독(William Oldroyd)에 의해, 영국을 배경으로 재해석된 영화인데, 공교롭게도 셰익스피어 원작이 러시아에서 다시 영국 작품으로 되돌아오면서 맥베스 고유의 플롯이 되살아 난 것이다. 창조적인 기호를 통해서.

이를 테면, 캐서린(카타리나)의 남편 보리스는 침실에서 아내에게 이렇게만 말할 뿐이다.

“Don’t smile.” (웃지마.)
“Take off your dress.” (벗어)
“Face the wall.” (벽 보고 서.)

달콤한 첫날밤은커녕 남편은 밤마다 저런 명령만 반복한다. 침실에서 말 할 수 있는 권리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다. 결혼이후 단 한 번도 아내를 안아준 적이 없다. 심지어 남편은 벗은 아내의 뒷모습만 감상하다가 잠들지언정 아내의 몸엔 손도 대지 않는다. 성기능 장애가 있는 것일까? 영화는 그런 상상을 일축한다. 남편이 살해당한 후,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이가 상속자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침실에서의 저런 기이한 권위 행태는 ‘쾌락도 남성만의 권리’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도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과 마찬가지로 예언의 플롯은 없지만 이 고압적인 권위의 언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예언 플롯을 대체한다. 맥베스의 욕망이 예언에 잠식당해 자신의 행동이 지배 받았던 것이라면, <레이디 맥베스>는 어느새 저 명령의 언어에 잠식당했기 때문이다. 하인 세바스찬을 처음 대면했을 때, 캐서린은 자기도 모르게 세바스찬을 이런 언어로 다루고 있었다.

“Don’t smile.” (웃지마.)
“Face the wall.” (벽 보고 서.)

비로소 남성을 다루는 여성이 된 것이다. 이는 맥베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예언을 장악해 스스로 예언을 성취해 내는 것과 일반이다. 따라서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에 담겨있던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즉 ‘권력의 여성화’를 창조적인 기호로 복원한 셈이다.

4.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이와 같은 시대적 여성의 욕망 곧, 여성성의 자유가 부각된 플롯을 대할 때면 우리는 대개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 즉, 부권 사회와 모권 사회 간의 대립으로 보기 십상이지만 권력 자체는 여성화를 띤다.

욕망하는 여성만이 권력화 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탐하는 모든 실력자들이 여성화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앞서 창극 <레이디 맥베스>를 취재했던 기사에서, 지난해 시점이었던 ‘현재의 세태’를 여성들이 욕망했던 ‘여성의 권력화’로 특정하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권력의 쟁취와 찬탈은 ‘여성화 된 남성의 권력’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맥베스」에서는 ‘레이디 맥베스’ 곧 맥베스의 아내가 그 예언을 정당성으로 둔갑시키는 일을 담당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통계가 예언을 대신하고 그 여성의 일 즉, 예언을 정당성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주로 언론이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 났으니까 말이지,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치고 찢어진 어머니 태에서 꺼내지지 않은 자가 어디있단 말인가.

에필로그:

역사적 캐서린은 이 영화 주인공과 이름이 같다. 스페인 출신의 그녀는 영국으로 시집을 왔는데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신랑과 함께 병이 들어버렸다. 신랑은 죽고 캐서린만 살아남았다. 시아버지 헨리 7세는 죽은 아들의 동생을 새신랑으로 주기로 약속했다. 실은 스페인과의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아예 파혼을 유보했던 것일 뿐 실제로 둘째 아들을 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처음 시집 온지 8년 만에 20살짜리 시동생과 결혼할 수 있었다. 비로소 정실 왕비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첫딸 메리를 낳은 후 폐경기를 맞은 캐서린을 버리고 하녀와 불륜에 빠졌다. 남편 헨리 8세는 내친김에 아예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싶어 했다. 이유는 형과 결혼한 적이 있었고, 처녀도 아니고… 당시 결혼의 무효화는 교황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열 받아 새로 차린 게 ‘성공회’였다.

참고로 찬송가 21장 ‘다 찬양하여라ㅡ’ 결혼 축복성가와 함께 시작되는 이 영화에서 기독교 사제는 캐서린이 시부와 남편 없는 사이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닐 때 감시자 역할을 한다. 캐서린이 돌아다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심방을 와서는 돌아다닐 것을 자제하라 권면하기 때문이다. 남편 역시 캐서린을 다그칠 때, “집에서 성경책이나 읽으라”고 명령한다.

佛 대선 후보(39세) 25살 연상 러브스토리

차기 프랑스 대통령은 39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뉴스가 아닙니다.

그는 64 세의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것도 아직 뉴스가 아닙니다.

그의 아내는 24년 전 그의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이것도 아직 뉴스가 아닙니다.

당시 이 선생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도 같은 반 친구였습니다… 그의 부모님을 포함한 모두는 생각했었습니다. 이 선생님의 딸이 그의 여자 친구라고.
ㄴㄴ그들이 틀렸습니다.

그는 15살이 되었을 때 이 담임 선생님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3명의 아이를 두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제 그 “행복한 결혼”은 이 글의 본론입니다.

17세 되던 해, 그는 그녀와 결혼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42세였습니다.
그들은 2007년에 결혼합니다. 우리의 이 남성이 30살 되었을 때이고… 그녀는 55세가 다 되었을 때입니다.

다음 달이면 그는 40살 생일이 되기 6개월을 앞둔 시점에 프랑스 대통령으로 뽑힐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사랑스런 아내는 이제 성인이 된 애들 셋과 손주 7명을 두고 있습니다. (첫 아이의 나이는 이 남편보다 두 ​​살이나 더 많습니다. 이전의 동급생이자 연인이었던 둘째는 그와 같은 나이입니다.)

그의 이름은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39)이며 그는 확실히 차기 프랑스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The next French President is 39 years old.
But that is not the news.
He is married to a 64 year-old, that is still not the news.
His wife was his class teacher 24 years ago…not still the news.
His then class teacher had a daughter who was his class-mate…everybody including his parents thought this teacher’s daughter was his girlfriend…nope they were wrong.
He fell in love with his class teacher when he was 15…she was “happily married” with 3 kids…now the “happily married” is relative in this context.
At 17, he promised to marry her. She was at the time 42 years.
They got married in 2007 with our man now 30…well she was almost 55.
Next month he is going to be sworn-in as the President of France 6 months to his 40th birthday while his lovely wife who has 3 adult kids and 7 grandchildren (her first child is two years older than her husband while her second child, the former classmate/sweetheart is the same age as him).
His name is Emmanuel Macron (39) and he is the next President of France.(Copied)

다음은 이들 부부에 대한 뉴욕타임스 기사 요약:

뉴욕타임스는 2월 2일자 기사에서 유력 주자로 떠오른 마크롱 부부의 이색적인 러브스토리와 그 배경의 프랑스적 상황을 조명했다.

마크롱의 부인 브리짓 트로뉴는 실제로 마크롱이 프랑스 북부 아미앵의 예수교 소속 고교생이었을 때 프랑스어 교사였다. 15세의 10학년 학생이었던 마크롱은 3명의 자녀를 둔 당시 40세의 기혼녀 트로뉴를 처음 만났다.

트로뉴는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고 학교 내 연극 동아리를 이끌었는데, 조숙한 마크롱은 이미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데다 트로뉴가 지도한 연극에서 주역을 맡았다. 트로뉴는 나중 마크롱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마크롱이 당시 보통의 청소년과는 확실히 달랐다고 회고했다.

11학년이 된 마크롱이 트로뉴에게 자신을 위한 희곡을 써 달라고 요청하면서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매주 금요일 대본을 갖고 만나면서 믿기 힘든 친밀한 사이가 됐다”고 트로뉴는 나중 파리마치에 밝혔다.

이들 관계에 놀란 마크롱의 부모는 그를 파리로 보냈다. 트로뉴도 지친 상태였다. 마크롱은 파리에서 프랑스 최고 명문인 앙리 4세 고교에 다녔다. 당시 아미앵을 떠나면서 마크롱은 트로뉴에게 “결단코 다시 돌아와 당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파리로부터 장거리 전화공세에 시달린 트로뉴는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파리에서 교사 자리를 구했다. 트로뉴는 나중 “당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을 놓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2007년 결혼식에서 마크롱은 트로뉴의 자녀들에게 자신을 받아준 데 감사를 나타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상적인 부부는 아니지만 실제 존재하는 부부라고 강조했다고. (출처: 2017/02/05일자 연합)

참고로, 2017년 프랑스 대선 진행 상황: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현지시간으로 지난 23일 오전 8시 전국 6만7천여개 투표소에서 일제히 시작됐다.

일부 대도시에서 오후 8시, 기타 지역에서 7시까지 진행되는 오늘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면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다. 하지만,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볼 때 다음달 7일 결선 투표에서 최종 승부를 가릴 것이 유력하다.

선두를 달리고 있는 후보는 유럽연합(EU) 강화와 기업규제 완화, 공무원 12만명 감축 등을 공약한 중도 좌파 신당 ‘앙 마르슈(전진)’의 에마뉘엘 마크롱(39)후보로, 여론조사에서 23~25% 가량의 지지율을 보였다.

그 뒤를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48) 후보가 바짝 뒤쫓고 있다. 르펜은 유럽연합(EU)과 유로존 탈퇴, 이민자 대폭 축소, 보호무역 강화, 반이슬람 기조 확대 등 ‘프랑스 우선주의’ 공약을 내세웠다.

중도우파인 공화당의 프랑수아 피용(63) 후보와 급진좌파 진영의 장뤼크 멜랑숑(65) 후보가 3· 4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1위에서 4위의 지지율 격차가 5%p 이내여서, 결선에 나설 2명의 후보를 점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번 대선은 지난주 목요일(20일) 파리 상젤리제 거리에서 경찰관들을 겨냥한 총격 테러가 발생한 직후 치러지는데다, 전 세계적으로 반 유럽연합(EU)과 보호무역주의 움직임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만큼 우파 혹은 좌파 어느쪽에서 프랑스 정권을 잡을 지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선거일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극좌 진영의 멜랑숑 후보가 약진하면서 박빙의 4강 구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결선 투표 진출에 탈락한 두 후보 지지자들의 민심이 어디로 쏠리느냐에 따라 극우나 극좌 후보의 당선 가능성도 있다.

극우나 극좌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면, 영국에 이어 프랑스의 유럽연합(EU) 탈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도 프랑스 대선 결과에 세계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프랑스 정부의 재무건전성, 공공부문 고용, 미국 보호주의에 대한 대응, 높은 실업률과 테러 대응책, 이민자 수용 문제 등을 이번 대선의 주요 이슈로 짚었다. (VOA 뉴스)

자유(Freedom)와 자유(Liberty)의 차이

다음은 자유(Freedom)와 자유(Liberty)에 관한 용법이므로 구별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

자유(Freedom)는 개인의 해방이지만 자유(Liberty)는 개개인 권리의 총합이다. 전자는 획득해내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기가 그냥 승인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알렉스 헤일리의 조상인 쿤타킨테는 자유(freedom)를 얻어야 하는 것이지만, 인공기를 태우거나 성조기를 태우거나 태극기를 태우는 행위는 모두 자유(liberty)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성애자가 결혼식 하는 자유(liberty)는 있지만 그것을 호적으로 펴내는 자유(freedom)는 거절 당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동성애는 죄라고 말할 자유(liberty)가 없어졌다. 아마도 전체의 자유(liberty) 총합이 위협 받는다는 생각에서 일 것이다. (트럼프가 당선됨으로써 상황이 좀 달라졌지만.)

따라서 민주주의(liberty) 자체는 대개 파쇼로 부터 탈출(freedom)하려는 동기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스스로 파쇼에 근접해 있다.

전체(democracy)를 표방하는 그것 역시 군주정(monarchy)의 부패 태(態)인 폭정(tyranny)에 상당한 그것을 늘상 자신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 하지만 자유(Liberty)가 진보보다는 보수의 양식이라는 정의는 학제적인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난 역사를 볼 때 진보가 지닌 동력은 또다시 그런 식으로 자유(liberty)를 내다 버리고 자유로부터 도피 해왔기 때문이다. 다시 파쇼의 품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진보에서 보수로 전향자들이 생겨나는 것도 그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니다.)

그것은 마치 선악과를 먹게한 뱀의 EGO가 결국엔 자기 꼬리를 물고 마는 형국이라 할까.

이 꼬리를 끊은 자가 진정한 진보요 자유자(ἀπελεύθερος) 아니겠는가.

기독교인의 성서는 그 유일한 자유(liberty)를 사랑이라 일컫는다.

아마도 자유(liberty)라는 말은 사랑(Liebe)이라는 말에서 왔을 것인데 그 어근을 밝히기가 어렵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 자유(liberty)를 리비도 즉 욕망(Libido)으로 더 활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자유, 사랑, 욕망, 이것들은 모두 같은 어근에서 출발하였다.

통합, 융합, 화합

‘통합’이라고 하는 용어는 둘 이상의 명확한 주체를 단수로 합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그들이 단지 서로 통하고 사귀는 때에는 ‘통섭’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다. 그리고 그 양자를 완전히 녹여 구별 없는 단수의 체계로 만드는 작업을 우리는 ‘융합’이라 부른다.
요즘 부쩍 전향자들의 언변을 통해 이 용어들을 자주 듣는다. 특히 음지를 향한 막연한 부채 의식으로 투사된 자기 카타르시스를 전향으로 오인한 분들로부터 그런 용어들을 듣는다.
주된 테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화두가 단지 민주주의라는 그 한 가지였던가라는 의구심을 내내 씻어낼 수 없다. 마치 자기들처럼 전향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반역이라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닌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고심한다. 그렇지 않나.
왜냐하면 동성이 결혼하는 나라들에서도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고, 백성은 굶어 죽는데 1000억 원에 달하는 쇠 덩어리를 핵 실험 명목으로 하늘에 내다 버리는 집단도 민주주의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통합’이라는 주제 자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전향자들이 전언하는 그대로 대다수 정당들은 ‘동원’을 ‘통합’인줄 착각하고 있고, 또 그 전향자 자신은 헤겔이 가르친 막연한 어떤 ‘종합’을 ‘통합’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가 아쉽다.
사제 신분으로 내거는 현실 정치 논평이 어찌 생각될는 지 모르겠으나 현실과 저 떨어진 하늘의 별나라 얘기나 걸어 올리고 찌개 끓여 먹는 사진이나 올리는 게 사제의 도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우리 기독교 사제들이 읽는 성서에서는 억지스런 ‘통합’이나 간교한 ‘통섭’이나 이교적인 ‘융합’이라는 용어 보다는 ‘화합’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화합’이라는 말은 화해(reconciliation)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사제들에게는 본분상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할 의무가 기본적으로 주어지지만 나는 특별히 양족에 포진한 전향자들을 위해 기도와 응원을 보내는 바이며, 어느 쪽이든 부디 ‘화합’을 이루어내길 축복하는 바이다.

마르크시즘이 교육을 덥칠 때

​(네오) 마르크시즘이 ‘교육’, ‘학교’ 라는 쟝르를 덥치면 어떻게 될까? 어떤 결과가 올까?

우리가 받아온 지금까지의 모든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상부구조 즉, 자본주의/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해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하는 제도일 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되면 현재 지금까지 전개되어 오던 교육 시스템, 컨텐츠(역사)는 전복이 필연적이다.

이것이 지금 벌어지는 일의 본질이며,
‘친일 미화’니 ‘독재 미화’니 하는 전술용 타겟들은 모두 먹기에 좋은 일종의 에피타이져(스끼다시)에 불과한 것이다.

(마르크시즘) 사상가들에게는 사실 항일, 반독재, 이런 거엔 큰 관심이 없다

이 벌레집을 건드렸기 때문에 단두대가 등장한 것으로 보면 큰 무리가 없다.

* 공중권세의 흐름과 지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데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