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밑의 욕망

1850년 뉴잉글랜드 어느 마을, 거대한 느릅나무 그늘에 가려 항상 음습한 생활을 이어가는 한 농가가 있었다. 캐벗(Cabot)이라는 노인의 가정이다. 이 집에는 엄청난 거구에 탐욕스럽고 색(色)을 밝히는 노인 캐벗과 그의 첫째 아들 에번(Even), 둘째 시미언(Simeon), 셋째 피터(Peter)가 살고 있다. 시미언과 피터는 금광에서 노다지를 찾겠다며 캘리포니아로 갈 꿈에 부풀어 있고, 에번은 아버지의 재산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그런 와중에 이미 나이가 일흔 다섯이나 된 아버지 캐벗은 젊고 싱싱한 여자 에비(Abbey)를 집에 데려다 놓았다. 아내로 데려온 것이다. 가난에 찌들어 방황하는 삶을 살던 에비는 안락한 생활에 정착하고자 이 고령의 노인 품에 들어 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요조숙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장남 에번을 보자마자 추파를 보내기 시작한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에번은 시미언과 피터에게 각각 3백 달러씩을 주고 아버지 유산을 포기하라 한다. 3백 달러씩 손에 쥔 두 사람은 집을 떠난다. 그러는 동안 에비는 싱싱한 육체를 이용해 노인의 마음을 손아귀에 넣고 자기에게 모든 재산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다. 그러면서도 에번을 유혹해 통간한다. 열 달 뒤에 에비는 에번의 아이까지 낳는다. 아버지 캐벗이 진실을 모른 채 자기 뒤를 이을 자식이 태어났다며 좋아하고 있는 동안, 계모 에비와 아들 에번은 불륜을 지속한다. 부자 간에 벌이는 이 같은 탐욕과 색욕의 뒤섞임이 짐승 같은 시간을 흘려보낸다.

Desire Under the Elms (1958)

에번은 에비가 자신을 이용해 낳은 아들로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 하려 든다는 생각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다. 그런 애증의 시간이 뒤엉키는 가운데 에비는 자신이 에번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겠다며 자기가 낳은 갓난아기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 불륜의 씨앗만 없애면 에번이 변심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안 아버지 캐벗은 보안관이 에비와 에번을 체포하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외친다.

“살인자들끼리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구나. 너희 같은 년놈은 한 나뭇가지에 매달아, 나처럼 늙은 사람 구경거리나 되게 해야해!”

이 막장 드라마는 결코 외설이 아니다. 1936년 노벨문학상과 네 번의 플리처상을 받은 현대 희곡의 거장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이라는 작품의 줄거리이다. (※ 찰리 채플린이 이 사람의 사위)

Desire Under the Elms (1958)

그리스 신화 메데이아(Μήδεια)를 본뜬 듯한 이 이야기의 제목에는 왜 ‘느릅나무’가 들어 있을까. 느릅나무의 학명은 Ulmus davidiana var. japonica이다. 이름에는 별 기호가 없다. 다만 아래 보다시피 날씨는 화창한데 무성한 잎 아래로는 언제나 음습하다.

아들과 젊은 새어머니, 하늘과 닿은 윗부분은 화사하지만 아래로는 음습한 이 두 젊은 주인공의 욕망은 이 극에 등장하는 두 그루의 느릅나무를 닮았다. 그리고 늙은 아버지, 신화적일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지닌 아버지 캐벗은 착취의 전형이다. 새 여자를 데려오기 전에 그는 두 번의 상처(喪妻)를 당하였는데,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내들은 캐벗에게 지나치게 혹사당한 나머지 죽어나간 것이었다. 두 그루의 느릅나무가 또한 이 두 아내들을 상징한다.

Musical Image.

그래서인지 프랑스에서는 ‘느릅나무 밑에서 기다리라’는 말은 ‘믿지 말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J. K. Rowling의 《해리포터》에 나오는 말포이의 마술 지팡이 재료가 또한 느릅나무이기도 하다. 욕심과 심술로 얼룩진 마술 지팡이.

느릅나무의 주인은 그런 욕망의 주인공일 것이다.

Liberalism Facebook

끝으로 저 희곡에 나오는 에번의 대사 한 대목을 소개한다.

(풀이 죽어 나지막하게) 알았어, 이제야 알았어. 날 농락했어. 바보 취급을 한 거야! 처음부터 도둑질을 할 생각이었지. 나를 끌어들여 아들을 낳아서는 아버지의 아들로 꾸미고, 이 농장을 차지하고. (괴롭고 저주스러운 눈길로 에비를 응시한다.) 당신 몸엔 악마가 깃들어 있어! 인간이면 그 따위 악한 짓을 할 순 없어. (아픈 마음으로) 차라리 당신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분노하며) 나도 복수를 하겠어. (사납게) 그 늙은이한테 복수하고야 말거야, 당신한테도. 떠들썩하게 자랑하는 아들이 누구라는 이야기를 해줄테야. 그리고 당신하고 늙은이가 서로 잡아먹도록 할거야. (결심한듯) 난 가! 돈을 벌어 가지고 돌아와서 당신들 두 인간을 길거리로 차내 버려야지. 당신은 아들하고 같이 굶어죽게 만들테야! (괴로워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지금 당장 죽여버리는 게 좋아. 다시는 보지 않겠어. 그것 때문에, 그게 생겼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만 거야. 계획적으로 도둑질을 하게 된 거지. 난 당신을 믿었어, 벙어리 황소처럼. 그래, 그런데 당신은 날 속였어.

김구의 ‘임시 정부’는 왜 ‘임시’로 끝났나

‘임시 정부’ Vs. ‘임시정부’ 

‘임시’라는 말은 명확한 기한을 정하지 않은 잠시 동안의 상태를 이르는 명사이다. ‘정부’라는 단어와 함께 쓸 때는 둘 다 명사이므로 띄어쓰기를 해야 하나, 그 임시 정부가 어떤 고유성을 띨 때에 한하여 그것은 ‘임시정부’라 붙여 써도 마땅할 것이다. 이 글은 이 문법적 고려를 가해서 쓴 글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설립된 조직이다. 이 기구는 1919년 4월 13일 상하이에서 처음 설립된 단체로서 3·1운동이 개시되고서 1개월 뒤에 결성한 단체이다. 3·1운동의 여세로 5개월 뒤에는 각지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경성(京城)에서 벌어진 3·1운동이 없었으면 단지 ‘임시 정부’로 머물렀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임시 정부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소리이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는 명칭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고안한 것은 신석우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고종(高宗)이 지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과 연관성을 갖는 문제에 대해 여운형이 망해먹은 ‘대한’이란 이름을 왜 쓰느냐고 이의를 걸었으나 ‘망한 이름으로 흥해보자’고 밀어부쳐 ‘대한민국’이 되었다 한다.

임시 정부와 이승만

바로 이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들이 통합될 때 그는 부재한 상태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그의 외교력, 즉 우드로 윌슨과의 친분을 고려해 추대되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이미 4월에 한성 임시 정부의 총재로 추대받자 워싱턴에 임시정부 총재 집무실을 열어놓고 대외적으로 (통합) 대통령 행세를 해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였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그를 뽑은 것은 상하이 임시 의정원이었는데,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그가 거주하고 있는 워싱턴에 발송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5년 뒤인 1925년에 그는 임시 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다. 발단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라는 해외 기구에 우리나라 통치를 위임했다는 사유였다. 당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이완용보다 더 한 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면직당했다. 하지만 반(反) 이승만 전선은 ‘위임통치’라는 단어만 전파했지, 그 국제연맹이 우드로 윌슨이 만든 기구라는 사실은 누락한다.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1918년 1월 8일 미국 국회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팽창을 막고 세계평화와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14개조를 연설한 일이 있는데, 이 14개조항이란 우리나라 같은 약소국에는 더 없이 중요한 독트린이었다. 그 요지는 제국 간의 비밀조약 파기, 항해의 자유 보장, 국가들 간의 관세장벽 해제, 군축,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자결과 자치권’이라는 대목이었다. 바로 이 ‘민족자결주의’가 우리나라 같이 식민 치하에 놓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윌슨 대통령은 연합국과 대결하고 있던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에 속한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것이었으나 미국에 거점을 둔 이승만 등 세계 정세 파악에 밝았던 지도자들은 이 원칙을 바로 우리나라에까지 강력하게 적용시키는 외교의 노력을 펼쳤던 것이다. 게다가 우드로 윌슨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승만의 스승이었다. 위탁통치인가 외교인가, 여전히 다툼의 여지가 있다.

3·1운동 정신의 피로감과 새로운 독립 전선

3·1운동의 흥분이 천년만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든 국외든 피로감에 젖어들기 마련이었는데, 국내에서는 일제의 박해 내지는 친화 정책으로 이탈자가 속출하고 있었고, 해외에서는 생활형 독립운동가들의 끊임없는 파벌 싸움으로 평소 애국적인 동포들도 신물을 내고 있었던 터이다.  이러한 피로감 속에서 기회가 찾아 왔다.  일본이 미국 본토를 때린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이 일본에게서 기습 공습을 받았다. 미국이 어떤 나라로부터 본토가 침공당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시 정부는 3일 후인 1941년 12월 10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뭔 힘이 있다고? 라고 말하지 말라) 미국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것임을 예상해서였을 것이다. 이때 애국심 있는 재미 한인들에게도 새로운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재미 한인 단체들은 앞뒤를 다퉈 미국에 충성을 다짐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것은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활동으로 나타났는데 이른바 ‘US War Bond’ 즉, ‘미국 전쟁공채’를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 한인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무려 50만 달러를 구매하였다고 한다. 1941년대의 50만 달러이다.

이 액수는 한인 개인당 약 2천불에서 3천불에 달하는 액수였는데, 이는 1900년대 초 노동이민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하기까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날은 ‘친미’라는 용어로 이러한 친화적 동력을 격하시키지만 미주 한인의 이러한 친화력은 1900년대 같은 이주 동양인이었던 일본인과는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처신이었다. 일본인은 한인보다 좀더 일찍 이주한 종족이었는데 이들은 기독교로 쉽게 개종한 한인과는 달리 자국의 불교 내지는 신도(神道/ 신토)를 좀처럼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2세들의 미국 동화작용까지 방해하는 사회 행태로 나타났는데, 미국 사회에 동화력을 갖춘 한인들이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간직하고 있는 양상과는 달리 당시의 일본인의 조국에 대한 열정은 무조건적 충성심에 기인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이 두 인종에 대한 미국 사회의 처후를 가른 것이다.

당시의 일본인은 한인보다 지위가 더 좋았음에도 전쟁이 터지자 미국 사회는 일본군이 미국 서해안에 상륙한다면 미국 거주 일본인들은 모조리 일본군을 도울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여론은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행정명령 9066’을 발동시키게 했다. 이 행정명령이 뭐냐하면, 미국 서부지역의 약 11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을 서해안에서 떨어진 중부사막 수용소들(relocation camps)로 보내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 까지 무려 3년 반 동안이나 감금을 시킨 일이다. 인권의 나라에서 어찌 이런 처후가 발생했느냐. 전쟁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자기 자녀를 미국에 보내 공부시키거나 아예 미국 시민권자로 만드는 반미주의자는 이런 걸 잘 말하지 않는다. 모르고 있거나.

정부가 될 기회를 놓친 ‘임시 정부’

한인들은 요인암살, 테러 등을 불사하여 실질적 무력투쟁을 명분으로 삼는 임시 정부(들)의 지지부진함과 끊임없는 분쟁 그리고 파벌싸움에 후원하는 것보다는 제2차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는 연합군을 지원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이라 여겼다. 게다가 전 연합군의 최종 병기고이고 인적, 물적, 모든 면에서 자원이 무한한 미국의 승전 가능성이 높고 또 그들이 세계의 헤게모니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조국 광복의 동력으로서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리하여 한인들은 광복군을 위한 독립금, 혈성금, 인구세 등 임시 정부를 위해 모금했던 액수의 수십 배를 더 미국 전쟁공채를 구입하는 데 사용했다. 노동이민으로 온 자신들에게 영사도 하나 보내주지 않던 나라, 그토록 부르짖던 호소에도 외면하던 조국에 애정이 흐릿해지다가 이 전쟁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이다. 애국심이.

한편 임시 정부는 구미외교위원부라는 기구를 두고 있었다. 1919년 8월 임시 정부 설립 당시 워싱턴에 설치하여 미국, 유럽 등을 상대로 외교를 주무하는 용도였다. 그러나 1925년 구미외교위원부의 2대 위원장이었던 이승만을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하면서 이 기구를 그의 사조직으로 분류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는 철폐시킨 기구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의 임시정부란 ‘임시 정부’였기에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속개했다. 그러던차 임시 정부는 1934년 다시금 이승만을 외교위원으로 선출한 터이다. 모지? 어쟀든.

그렇다면 임시 정부와 주미 외교위원부는 2차세계대전으로  찾아온 이 절호의 독립의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러지를 못했다.

미주 한인을 중심으로 미국전쟁공채 구매 등 적극적 의사 표현에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동안, 임시 정부는 궁극적으로 ‘참전’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게는 이 전쟁이 자국을 방어하는 전쟁이었겠지만, 이면에서 이 전쟁은 세계 질서를 재편하는 전쟁이었기에 약소국들은 너도나도 참전을 선언하고 있는 분위기인데도, 진주만 공습 3일만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한국 임시 정부가 참전 선언은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미국의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은 이승만이 중경 임시 정부의 워싱턴 대사인 것까지는 인정하였지만,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는 끝끝내 ‘임시정부’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대변인 역이던 크롬웰(James Cromwell)은 1942년 6월 23일 임시 정부 승인을 위해 미국 국무성과 더 이상의 대화를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결론을 내린다. 대체 왜 그리되었을까? 이승만이 소극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는 하였으나, 광복군은 마지막 순각까지 적극적인 참전의 의사를 밝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일부 자신의 목숨을 던진 의사들을 통해 무력 테러는 있었지만, 이제 비로소 전쟁다운 전쟁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정작 일본과의 접전에 나서지 않은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이는 다른 약소국의 상대적인 반응에서 드러난다. 당시 연합국들과 더불어 참전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정부’로 인정을 받는 기회였다. 왜냐하면 파시즘이 기세를 떨칠 당시 ‘임시 정부’는 우리에게만 있었던 게 아니다. 식민지 및 종속국들은 반 파시즘의 기치 아래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 가운데서 이를 테면, 줄기차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티토(Josip Broz Tito)는 연합군에 참전함으로써 우방임을 인정받았고 전쟁 후에는 그 세력을 유고슬로비아 독립국으로 인정하였던 사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 광복군은 참전 의사를 밝히지 않았던가?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용감하던데.

이로써 결과적으로 상해 임시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해외 거점을 두고 한인을 대표하는 여러 한인 단체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만약 중경의 ‘임시 정부’만을 정부로 인정한다면 다른 단체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는 사유를 스스로 제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상해에서 독립금, 혈성금, 심지어 인구세 등의 명목으로 각지의 한인들에게서 거둬갔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의 기원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과 접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참전에 대한 어떠한 구두 천명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종전이 되었다. 당시 재미 한인 단체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한족연합위원회는 중경 특파원을 보내 중국 한인을 항일 전선에서 적극 참가하게 하여 미국 정부로 하여금 상해 임시 정부를 교전국 정부로(연합군 일원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아야 정부 승인을 받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으나 광복군은 아무런 접전 없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 뉴스를 맞은 것이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표 김구는 이르기를, 임시 정부와 광복군은 한 일이 없어 앞으로 발언권이 약하게 되었으므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였다 전한다. 실제로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이 아니었기에 해방된 경성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입성하지를 못 하였다. 임시 정부 대표들은 모두 다 개인 자격으로 미소 양군이 점령하고 있는 38선으로 분단된 조국에 돌아왔다.

현대에 들어 대한민국의 기원에 대한 논란이 가열차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대다수는 그 임시 정부를 ‘김구의 임시 정부’로 기억하는 까닭일 것이다. 김구를 위대한 선각자로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던가?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임시정부로서의 권위를  ‘김구의 임시 정부’로 기억하는 한,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고정관념은 당시 함께 공존했던 여러 임시 정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사실의 반증으로 작용하는 모순에 봉착할 것이다.

‘임시 정부’가 아닌 ‘정부’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부의 궁극적 요체는 ‘군사력’에 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나라는 세상에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현대적 의미로서의 전쟁이란 일종의 진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외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은 현대만이 아니라 과거 임시 정부 때도 그랬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나라는 2차세계대전 당시와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지정학적인 이유로 열강의 틈에 끼어서,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이념의 갈래에 끼어서, 언제나 가장 많은 피를 흘리는 당사 국인 우리 자신은 결정적 상황에서 스스로의 당사 국 지위를 내려놓는 민족성을 보이는 것이다. 혹시 자주독립을 꿈꾸며 광복의 동력을 연합군에게 내주고 만 것이었다면, 자주독립을 위해 그렇게도 사드(THAAD)의 해체를 부르짖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주독립이라는 술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외교력이 없는 국가에서만 돋보이는 용어일 수 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역사적으로 스스로 독립을 이룬 나라란 없다. 있다면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독립을 할 필요가 없었거나, 아니면 전혀 가치가 없는 땅을 영토로 딛고 있었거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필연적으로 힘 있는 누군가가 주권을 부여해 줄 때에만 비로소 독립은 성립될 수 있었다. 그것이 역사이다. 그게 아니라면 ‘임시 정부’는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임시 정부’란 말을 써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임시 정부는 그렇게 임시로 끝났다.

 

 

‘지방분권 개헌’은 왜 반대해야 하는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이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된 이래 미국은 줄곧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전쟁은 영국계 백인 중심의 민족적 독립국가 체제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독립과 더불어 발생하는 끊이지 않는 혼란은 결국 5년간의 내전(남북전쟁)을 통해 해소되었고, 산업과 금융업이 발달한 동북부 지역은 명실 공히 아메리카합중국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벤치마킹한 경제체제 곧, 부국경제체제로서의 세계를 중심부(core, 영국본국, 주체지역)와 주변부(periphery, 준식민지 내지 식민지)로 나누는 경제발달을 하였듯이, 천연자원이 풍부한 남부와 서부를 내부적 경제식민지화로 구현하면서 성장하였다.

드넓은 미개척 대륙에 동서로 횡단하는 철도를 놓으면서 미 전역을 연결하는 철도통신망을 갖춘 단일 경제∙정치 체제를 이룩한 것이다. 이는 지상 최대의 영토와 천연자원을 소유한 연방정부체제로서의 공화국이 되게 해주었다.

이것이 지방분권의 의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지방분권이 본격화된다면 필연적으로 중심부와 식민지(내지는 준식민지)로 나뉘기 마련이며, 영토가 좁고 천연자원도 없는 상황에서의 경제식민화라면 오로지 한가지 방식, 그 양상은 동북(산업금융)ㅡ남서(천연자원)로 연동되던 미국식 연방체제와는 달리, 북(핵/이념)에 식민지화 된 남(산업금융)으로서의 사회주의(내지는 공산주의)연방으로 향할 우려가 크다. 이미 통일 이전임에도, 경제가 급속도로 이념에 부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방분권은 반대함이 마땅하다.

우리사회를 덮친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윈스턴 처칠로 분한 게리 올드만.

플라톤은 인간이 구현하는 정치·사회체계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왕/군주 일인이 통치하는 군주정(Βασιλεία),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귀족정(Α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다수가 정치를 주도하는 민주정(Δημοκρατία). 아울러 그는 이러한 체제들이 각각 그 일인의 폭정(τύραννος), 소수 엘리트만의 과두정(ἀριστοκρατία), 그리고 다수의 우민화를 통해 중우정(ὀχλοκρατία)으로 변질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인이 지배하는 군주정과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귀족정, 그리고 다수의 민주정이 공존하는 혼합정치가 분명 존재하며 바로 그 혼합의 왜곡에서 폭정, 과두정, 중우정으로 나타난다고 개정하였다.

1938년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뮌헨 회담 장소로 가는 모습

이들보다 한 세기 뒤에 태어나 활동한 역사가 폴리비우스(Polibius, BC 200-118)는 이들의 정치이론에 발전론을 입혀서 체제의 몰락이란 군주정에서 폭정으로, 귀족정에서 과두정으로, 민주정에서 우민화로 퇴행하는 데서 기인하기에, 로마 제국처럼 군주정에서 귀족정으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하는 것이 제국의 안녕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면서 그 혼합의 시스템으로서 ‘공화정’ 곧 집정관, 원로원, 호민관으로 구성된 체제를 그 완전체로 역설하였다.

하지만 그 완전체조차도 몰락을 할 때는 각각의 머리로부터 썩어 들어갔던 것을 감안하면 플라톤의 근원적 통찰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며, 또한 그 체제의 운용면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연(敷演)했던 이상의 다른 혼합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파시즘(fascism)의 등장을 통해서였다.

군중에게 연설하는 무솔리니

파시즘(Fascism/ fascismo)은 ‘묶음’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파시오(fascio)에서 온 말이다. 그런데 이 파시오란 고대 로마의 정무관이 들고 다녔던 파스케스(fasces)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럼 대체 이 파스케스가 뭐에 쓰는 물건이냐. 파스케스는 막대기를 여러 겹으로 묶어서 그 끝에다 도끼를 달아놓은 일종의 권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는 상징물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체벌이나 처형에도 사용되었으며 그 상징(물)이 기표하는바, 파시즘이란 한마디로 집단주의의 총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1인 독재자를 지칭하는 말로 전용되지만 실상 역사적으로는 ‘노조’(노동조합)를 이르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이다(un fascio/ 1910).

파스케스를 든 집정관 모습.

이 일단의 결속주의(結束主義)는 정치적으로 적용될 때 국가주의, 국수주의적 색채 속에서 급진적 성향을 띠기 마련인데, 여기서 응용해 뻗어 나온 것이 바로 나치즘(Nazism)이었다.

새롭게 인종적 어프로치를 한 셈이다.

아돌프 히틀러

고대 로마 사회에서 폴리비우스가 자부하던 정치 발달 체제는 썩어 몰락하였음에도 그 어느 것 하나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며 도리어 새로운 혼합의 옷을 입고서 근대 전유럽을 활보하였고, 이는 어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무솔리니와 히틀러라는 인물을 통하여서 아주 실제적이면서도 막강한 위력이 되었다. 다른 말로하면 왕도 없어지지 않았고, 귀족체제도 없어지지 않았으며, 다수와 혼합된 채 폭정, 과두정이 그대로 살아서 새로운 변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시대가 윈스턴 처칠이라는 인물을 불러냈다.

전쟁에 패전한 지휘관이었고, 인격적으로는 괴팍하기 짝이 없어 정치적 동반자도 없이 소외된 채 늙어 가고 있던 한 노인을 왜 다시 불러냈을까. 이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가 어느 정도 가까이서 그에 관한 근접/접사 촬영을 해 놓고 있다.

처칠의 웅얼대는 발음까지 훌륭히 연기해낸 게리 올드만.

윈스턴 처칠을 불러낸 이유는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저 파스케스(fasces)의 악을 일찍부터 파악을 하고서 시종일관 예언자의 목소리를 낸 정치인은 윈스턴 처칠뿐이었다는 사실.
둘째, 저 파스케스 악에게 모조리 패하거나 항복하여 유럽 전역이 두려움에 압도되어 떨고 있을 때 마지막까지 무릎을 꿇지 않음으로써 그 악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한 유일한 유럽 정치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 폭정·과두정·중우정의 왜곡된 혼합이 탄생시킨 저 파스케스 악은 진정한 민주주의 곧, 왕·귀족·다수가 다같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영국 민주주의의 힘으로 파쇄시킬 수 있다는 그의 결기와 확신.

의회 당직자들에게 연설을 통해 사전 설득을 하는 처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곧바로 냉전의 시대로 진입한다. 냉전의 시대(Cold War Age)란 앞서 저 악의 막대기 묶음을 무찌르기 위해 동맹에 참여했던 소련을 중심으로 동구권 전역이 공산주의 전선으로 재편된 시대를 말한다. 그 막대기 묶음이 공산주의로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냉전의 시대마저도 종식된 지금은, 뒤 늦게 우리 대한민국을 접경하여 아주 좁은 범주로 그 막대기 묶음의 권역이 줄어들었지만, 파급력 만큼은 가히 전 세계를 향한 위협을 구가하고 있음을 우리 세대가 목격한다.

특히 그 여파로 우리 삶 깊숙이에 그 막대기 묶음이 맹위를 떨치고 있건만 안타깝게도 우리 곁엔 아직 처칠이 없어 보인다.

에필로그.

윈스턴 처칠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그 파스케스(막대기 묶음)에 대항하여 ‘민주주의’ 가치를 반복해 되뇌이지만,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파스케스에게 점유당한 오늘날에는 윈스턴 처칠이 끊임 없이 가치로 되뇌었던 그  민주주의가 실상은 ‘자유민주주의’(Δημοκρατία)였다는 사실로 역류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증했던 그 혼합의 왜곡이 우리사회에서 폭정, 과두정, 중우정으로 고스란히 시연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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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에서 ‘자유’가 빠지면 어떤 일이 생기나

올해 지방선거와 함께 ‘개헌 국민투표’ 여부를 놓고 정치권에서 격렬하게 논쟁 중인 것으로 보인다.

개헌의 주된 골자가 담긴 ‘헌법 개정 자문보고서’는 지난 해 2월초 53명으로 구성된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같은 해 10월에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개헌특위 인원은 36명이며, 소속 정당 분포를 보면 민주당 15, 한국당 14, 국민의당 5, 바른정당 1, 정의당 1명이며 한국당 소속 의원이 위원장이다. 특정 정당 한 편에서 작성한 것은 아닌 셈이다.

우리 실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다가올 만한 눈에 띄는 주요 변경 부분을 살펴보면,

제33조 2항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보건의료서비스 보장 받을 권리
제35조 1항 모든 국민의 노동의 권리 → 모든 사람의 노동의 권리
제35조 2항 기간제/파견제 사실상의 금지
제35조 3항 최저 임금제 시행
제35조 5항 해고의 금지
제36조 2항 노동자는 사업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현재 한창 이슈가 되어온 기간/파견제 고용 문제나 최저임금제 문제도 들어가 있고, 사회보장 및 의료 복지가 한층 강화된다거나 노동의 권리가 외국인에게까지 폭넓게 적용될 것이라는 전망은 다 위와 같은 문안으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기의 항목을 포함 수많은 개정 항목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개정 부분은 아마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전문과 총강 부분이다.

전문(前文) 부분.

총강 부분.

바로 ‘자유민주’에서 아예 ‘자유’를 제거한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민주란 무엇인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기 때문에 하나를 생략한 것인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를 제거한 것인가. 얼핏 보기에 양자는 같은 것일 수 있다. ‘자유’는 곧잘 ‘민주’라는 이름으로 임하고, ‘민주’ 또한 ‘자유’로서 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양자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기도 하다. 현실 속에서 자유(또는 민주)의 궁극적 파괴는 바로 자유(또는 민주)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양자의 혼용은, 명백하게 다른 두 개의 개념을 하나의 유사(Similarity)가 되도록 만드는 인간이 지닌 강력한 변용술에 따른 것으로(그것을 주로 ‘정치’라 부른다), 둘 중에 하나를 남겨야 한다면 그 한 가지는 바로 ‘민주’가 아닌 ‘자유’였다는 사실을 포착할 수 있다. 이는 자유가 민주를 대체할 수는 있지만, 민주가 자유를 대체할 수는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보통 ‘종교의 자유’라고 말하지 ‘종교의 민주’라고 말하지는 않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 두 종류의 실체를 그 어휘가 갖는 용례와 용법을 통해 확실한 차이를 드러내 보일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와 민주’는 자유(liberty)와 자유(freedom)라는 유사로 표현된다.

이를 테면 이렇게 다른 두 자유이다.

트럼프 대통령 이전의 미국은 동성애 자유(liberty)를 위해 개인과 종교의 자유(freedom)를 박탈시켜 버렸지만, 트럼프가 권력을 쥔 후에는 동성애자에게 있는 자유(liberty)가 개인과 종교의 자유(freedom)를 파괴하지는 못하도록 복원시켰다. 여기서 보았다시피 자유(Freedom)는 개인의 해방이지만 자유(Liberty)는 개개인 권리의 총합이다. 전자는 획득하고 쟁취해 내는 것이지만 후자는 자기가 그냥 승인하는 것이다.

또한 동성애의 자유(liberty)를 무한대로 넓혀 놓았던 오바마와 동일한 인종인 알렉스 헤일리의 조상 쿤타킨테는 자유(freedom)를 얻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지난 2011년 모 서울시장 후보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는 헌법에 나와 있는 표현의 자유(liberty)를 포기하고, 이를 억압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한 바도 있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돈 있는 동성애자 연예인들이 호화 결혼식 하는 자유(liberty)는 있지만, 그것을 호적으로 펴내는 자유(freedom)는 아직 거절당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실권할 경우 동성애는 죄라고 말할 자유(liberty)가 없어질 가능성이 큰데, 일군의 동성애자 전체의 자유(liberty) 총합이 위협 받는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상기의 개헌 내용을 볼 때 곧 우리도 동성애는 죄라고 말할 자유(liberty)가 없어질 가능성이 짙어졌다.

이상이 명확하게 다른 두 자유의 용법과 실체이다.

그렇다면 앞서 ‘종교의 자유’라 말할 수는 있어도 ‘종교의 민주’라고는 말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의 그 ‘민주’, 즉 자유가 민주를 포함할 수는 있지만 자유를 포함하지 않은 ‘민주’는 어떤 개념일까.

이런 것이다.

민주주의(liberty) 자체는 근현대에 대개 독재나 집단주의로부터 탈출(freedom)하려는 동기에서 시작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스스로 독재나 집단주의에 근접해 있다. 민주주의 즉, 전체(democracy)를 표방한다고 하는 그 가치 역시 언제나 군주정(monarchy)의 부패태(態)인 폭정(tyranny)을 늘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통상은 독재 폭정(τύραννος)으로 변질 될 우려가 있는 1인 군주정(Βασιλεία)보다는 귀족정(Αριστοκρατία)이 낫고, 자기네끼리 과두정(ἀριστοκρατία)이 될 우려가 있는 귀족정치보다는 민주주의(δημοκρατία)가 낫다고 알려져 현대에는 민주주의를 자유(liberty)로 변용시켜 계몽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명제로 등장했던 이들 고대 그리스어에서 민주주의를 뜻하는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는 ‘사람들’(people)을 뜻하는 데모스(δῆμος)와 법을 뜻하는 크라티아(κρατία)가 합쳐서 된 말이며, 이 용어를 동시대 언어로 공히 사용했던 기독교 경전에는 그 ‘데모스’라는 말이 총 서너 군데에 나오면서 다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이다.

1. 파울로스(Παῦλος)가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이 다 그리로 넘어가자 유대인이 주도한 ‘데모스’들은 시기가 나서 시장바닥의 불량배들을 동원해 떼를 지어 일부러 막 소란을 피우며 파울로스 일행이 머무는 숙소로 난입하여 파울로스 일행을 ‘데모스’들에게 끌어낸다. ㅡ사도행전 17.

2. 파울로스가 에페소스의 한 극장에서 ‘데모스’에게 이르기를 미개한 미신에 속아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하자 우상 제작 업자들이 ‘데모스’를 격동시켜 파울로스를 잡으라고 선동하자 ‘데모스’들이 막 흥분을 하며 밀려든다. ㅡ사도행전 19.

3. 헤로데가 하루는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데모스’에게 연설을 하자 ‘데모스’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며 몰려든다. ㅡ사도행전 12.

이것이 ‘자유’가 빠지고 ‘민주’만 남은 기본질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 참고로 상기의 개헌 초안 작성에 참여한 입법 의원들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이주영 자유한국당
간사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서울 구로구갑)
간사 정종섭 자유한국당 (대구 동구갑)
간사 김관영 국민의당 (전북 군산시)
위원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위원 강창일 더불어민주당 (제주 제주시갑)
위원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경기 부천시원미구갑)
위원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위원 박병석 더불어민주당 (대전 서구갑)
위원 백재현 더불어민주당 (경기 광명시갑)
위원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충북 청주시청원구)
위원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대전 유성구을)
위원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위원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경기 안양시만안구)
위원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경기 안산시상록구갑)
위원 전현희 더불어민주당 (서울 강남구을)
위원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서울 강동구갑)
위원 최인호 더불어민주당 (부산 사하구갑)
위원 강효상 자유한국당 (비례대표)
위원 김성태 자유한국당 (비례대표)
위원 김정훈 자유한국당 (부산 남구갑)
위원 나경원 자유한국당 (서울 동작구을)
위원 성일종 자유한국당 (충남 서산시태안군)
위원 윤재옥 자유한국당 (대구 달서구을)
위원 이종구 자유한국당 (서울 강남구갑)
위원 이종배 자유한국당 (충북 충주시)
위원 이채익 자유한국당 (울산 남구갑)
위원 정용기 자유한국당 (대전 대덕구)
위원 최교일 자유한국당 (경북 영주시문경시예천군)
위원 홍일표 자유한국당 (인천 남구갑)
위원 송기석 국민의당 (광주 서구갑)
위원 이상돈 국민의당 (비례대표)
위원 이태규 국민의당 (비례대표)
위원 천정배 국민의당 (광주 서구을)
위원 하태경 바른정당 (부산 해운대구갑)
위원 노회찬 정의당 (경남 창원시성산구)
출처: 개헌 특위 홈페이지